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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Mar 18. 2018

공황장애의 끝 3 _ 지금 이 순간


*공황의 끝 3 -  어떤 깨달음


오늘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불안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못 버틸 정도로. 왜 그랬을까? 요즘 내가 너무 나를 압박했나? 분명한 건 하나도 없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최근 강의에서 사람들이 16명이 왔다. 좋은 결과였다. 어떤 사람은 내 강의가 좋았다고 일부러 댓글도 남겨주었다. 이 정도면 성공적인 강의가 아니었나? 그런데 나는 도대체 뭐가 불만인가?


다혜(사촌동생)가 선물한 레드향을 먹으면서도 고맙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늘 오후엔 엄마아빠가 마트에서 장을 봐 왔다. 홈플러스 바삭한 빵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엄마가 라면을 끓여 주었다. 계란과 파, 오뎅도 정성스럽게 넣어주었다. 그저 의식없이 먹었다. 삶에 감사하다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 그런 개념이 있기는 한걸까? 우리는 다 그냥 살지 않나?


최근 사진입니다 ㅋ


머릿 속이 복잡해서 정말 미치는 것 아닐까? 그런 불안에 시달리면서 집으로 가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오늘 하루는 제정신으로 살고 있구나. 적어도 오늘 하루는. 이 순간은 내가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있구나.’ 그래 지금은 내가 살아있다. 건강하게 숨도 잘 쉰다. 어쩌면 이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한 것이 아닐까? 곧 불안이 멈췄다.


친구가 내게 했던 말 ‘죽기밖에 더하겠나?’ 오늘 이 말로 결국 하루를 버텼다. 내 친구 ㅇㅇ는 가끔 자살을 생각한다고까지 말했다. 그렇다고 그 친구가 힘들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 친구는 씩씩하다. 돈만 있으면 어디든 잘 다니고 잘 논다. 그냥 돈이 없어서 짜증난거다. 그건 감정적인 문제와는 별개다. 내가 알던 사람은 여자친구가 떠났단 이유로, 수면제를 다량으로 먹고 결국 병원 가서 겨우 살았다. 난 그 사람에게 차라리 강아지를 키우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 사람은 귀찮아서 싫다고 했다. 그래, 어떤 사람은 불편하고 귀찮은 것보다 자살이 더 손쉽다고 여기는 것 같다. 죽음은 어쩌면 참 가벼운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 결국 잘못돼서 내가 잘못되고, 죽음까지 가면 어쩌지? 이런 생각도 심각한 일도 아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죽음이 가볍고, 두렵지 않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카찬차키스의 묘비명처럼 욕심이 없고, 두려운 것이 없으면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욕심도 많았고, 두려움도 많았다. 지금 머릿속에 해야할 일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걱정도 가득하다. 결국 이런 게 문제인 걸까?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숨을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이런 말은 효과를 갖게 된다. 부정적인 감정도 그 근거가 죽음 이상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만 두려워하지않으면 언제든 행복할수 있는걸까


반성하다. 내 의식은 현재에 있지 않았다. 난 항상 죽음을 생각하면 잠시나마 의식이 현재에 머무르게 된다. 그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다. 극심한 불안이 와야지 그것도 가능했다. 평화로울 때에는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꽉 찬다.


아침에 일어나면 할 일들로 꽉 찬다. 나는 힘차게, 이 일들이 내겐 주어진 선물이라고 세뇌한다. 억지로 이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처럼 불안이 심해질 때면 늦잠을 더 잔다. 그리고 후회하고,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농구를 하러 간다. 그렇게 또 하루를 버틴다. 이런 날엔 내게 주어진 일들이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드디어 답을 찾았다. 긍정적으로 미래를 받아들인다해도,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내 의식은 한 순간도 현재에 있지 않았다. 엄마가 라면을 끓여준 그 순간에도 감사할 줄 몰랐다. 진짜로 내게 주어진 일을 선물로 받아들이고, 잘 하려면 잡념(걱정)이 들어오면 안 된다. 내가 만약 진짜로 감사할 줄 알고, 내 의식이 현재에 있다면 이런 잡념도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폐쇄된 곳, 어둠, 트인 곳(이런 흔한 소재들)이 두렵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감사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잉여적이고, 노력이 들어가는 일일 수도 있다. 바쁜 데 삶에 감사할 시간이 있겠는가? 하지만 좀더 넓게 보면 감사하고, 현재를 느끼는 것이 더효율적인 것일 수도 있다.


명상의 시작은 죽음이다. 현재는 죽음을 상기하지 않으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나도,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이런 마음으로 미래의 관심을 다 끊어야 한다. 그래야 현재를 더 잘 느낄 수가 있다. 내가 미래의 일을 한다고 해서 내 의식까지 미래로 갈 필요는 없다.


우리가 긍정적 힘을 이용한다는 것은  좋은 느낌의 힘으로 산다는 것이다. (좋은 느낌은 우리가 탁구, 농구, 볼링 등 운동할 때 하체의 힘을 이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안정적인 힘이 있다) 그 좋은 느낌은 오직 죽음, 현재에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나 죽음을 생각한 뒤에 미래의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불안이 밀려와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진짜 감사해보자.


그런 경지에 이르면 주변이 친구들이 다시 보이게 될 것이고, 가족들이 특별하게 보이게 될 것이다.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모든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이 사람들 말고 아무 의미도 없다. 내일은 없다.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 라디오가 가장 소중하고, 오늘 하루가 나에게 전부인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우리는 항상 그 느낌을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 미래에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의 일은 것은 모두 허상이다. 허수이다. 신기루이다. 라깡이 말한 공백의 연안가이다. 거기에 가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존하는 것은 이 순간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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