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정적 감정을 모른척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긴다. 어차피 우리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행복의 기원>을 쓴 서은국 교수도 ‘행복도 결국은 자연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 그것자체로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지금은 내가 기분이 안 좋지만 내일 친구와 여행을 가거나, 여자와 소개팅을 약속을 잡는다면 기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좋아질 것이다. 평소에 나는 부정적 생각이나 감정에 저항하느라 힘들었다. 그런데 이런 이벤트가 있으면 내 마음이 저절로 그런 일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부정적 생각에 저항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최근에 술자리에 갔는데 한 여성이 내 옆에 앉았다. 그날따라 나는 말이 잘 나오고, 유머도 괜찮았다. 여성이 나를 보며 웃었다. 그날 낮에 분명 기분이 안 좋았지만 술자리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대학생 때는 매일 이렇게 살았던 것 같다. 그때 그게 내 세상의 전부였다. 그래, 사람은 이렇게 단순하게 사람들과 웃고 떠들어야 한다. 그러면 내가 했던 고민도 저절로 까먹게 된다.
만약 우리가 행복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프로이트는 우리가 움직이는 근본적 동력이 성적(스킨십)욕구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아들러는 우리가 남들보다 우월해지고 싶은 욕구에서 모든 행동이 나온다고 하였다. 이 두 심리학자는 대단한 사람들이니, 이 두 사람의 이론들만 보자. 우리는 성적인 만족을 느끼거나, 남들보다 우월적인 위치에 있을 때 만족을 얻을 것이다. 내가 이 두 가지 요소를 만족시킨다면 나의 감정도 따라서 분명 좋아질 것이다. 간단하다. 그렇게 해주자.
내가 소개팅을 하거나, 술자리에서 여성을 웃긴 것은 이 두 가지를 간접적으로 만족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지금 기분이 좋지 않더라도, 그 두 가지를 만족시키는 행동을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괜찮아질 것이다. 그것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자연법칙과도 연관되어 있다. 자연의 법칙이 우선이니 감정 자체는 의미도 없고, 생존에 저절로 따라올 뿐이다. 그러니 감정에 집착하지 말자. 내가 공황이 나았다고 확신했던 순간은 얄미울 정도로 부정적 감정을 무시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이다. 부정적 감정은 친구에게 놀자고 전화한통만 하면 쉽게 없어질 테니깐.
나 혼자서 행복을 위해 고민할 필요 없다. 아들러는 ‘관계’ 속에서만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혼자 끙끙 앓으면서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사람들 속에서 술 마시고, 웃고, 떠는 것이 훨씬 더 정신건강에 좋았다. 관계란 것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을 바란다면 ‘타인과의 관계’가 개선될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편이 좋다.
타인은 새로운 세상이고, 현실이다. 모든 걱정을 잊게 만드는 큰 힘이 있다. 혼자서는 부정적 감정의 무게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같이 있으면 모든 것이 가벼워진다. 무섭고 버거운 일이 있을 때, 친구에게 그 일을 말하고 웃어 버리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옆에서 누군가가 어떤 말을 하면 순간 복잡했던 것들이 명료해진다. 우리는 타인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 타인 속에서 우월감도 맛보고, 안전함을 느끼고, 따뜻함도 느낄 수 있다. 혼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세상이 바로 타인에 있다. 그러니 이제 밖으로 나가자.
정신분열(조현병)에 걸린 사람들도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이상 타인의 말의 듣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혼자만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존중해주면 기적처럼 조현병이 낫는 사례를 책에서 많이 봤다.
나는 4월부터 ‘독립책 만들기’ 모임을 할 예정이다. 일종의 글쓰기 모임이다. 원래는 바빠서 그런 거 안 하려고 했다. 그런데 요즘 너무 혼자서 글만 쓰는 것 같아서, 사람들도 좀 만나려고 모임을 하기로 결심했다. 사람들과 굳이 만나서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작품을 구상하는 것이 쓸데없이 보일 수도 있다. 그냥 내 혼자 글을 쓰면 더 빨리 작품을 쓸 수 있는데, 사람들과 함께 글을 쓴다는 것이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은 새로운 세상이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공시생 시절 여학생들이 동영상 강의 들으면서 스타강사들의 팬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 짝사랑에 가깝게 보일 때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상관없었다. 학생들은 그 과목을 즐겁게 공부했고 합격하기만 하면 된다. 어떤 친구는 좋아하는 강사 동영상을 계속 반복해서 보았다. 나는 그것은 비효율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복습도 하면서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라고 알려 주었다. 하지만 나는 시험에 떨어지고 그 친구는 붙었다. 중요한 것은 효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느냐이다. 억지로 공부한 사람들은 나중에 그 과목을 다시 보기 싫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사람들을 만나면서 즐겁게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좀 돌아가는 것 같지만 어쩌면 그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