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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Apr 20. 2018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기

내가 정시에 퇴근 한 것은 처음 일주일이 전부였다. 나와 친했던 직원 a, b가 있었다. a는 태어났을 때 뇌를 다쳐 뇌병변 장애인이 되었다. 그는 어릴 때 시설에서 살다 자립했다. 걷기가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b는 어릴 때 교통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보통 사람들은 상상을 못할 것이다. 그들은 사소한 스트레스부터 인간관계, 연애 등 모든 고민을 나에게 상담하였다. 그들은 사람에 대한 의심, 미움, 상처가 너무 커서 감당이 안 될 정도 였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또 들어주었다. 한번도 그들을 싫어한 적이 없었다. 그들을 싫어할 자격도 없었다. 어쩌면 그들을 동정했을 지도 모른다.

당시 내 소원은 집에 빨리 가는 것 하나였다. 그들은 일을 하면서도 내게 의지를 많이 했다. 내 일을 마치면 그들의 일까지 해줘야 했다. 몸이 불편하니 그럴 수 있다. 난 그들의 어떤 부탁도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감사기간이 가까워질수록 일은 더 고되었다. 저녁이 되면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저녁 먹는 데 한 시간, 담배 피우고 남 뒷담화 하는데 한 시간 걸렸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밤 10, 11시에 퇴근하면서도 그들은 내게 술을 먹자고 제안하였다. 내 기억으로 내가 먼저 술을 먹자고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내 마음이 약해서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새벽 1시까지 3~4일 연속 달린 적도 있었다.

아침에 내가 제일 먼저 출근해서 사무실 청소를 하였다. 그들은 몸이 불편해서 출근 시간이 늦었다.  출근해서 담배 한 대 피우면 오전이 다 지나갔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그들은 계속 옆에 있어달라고 하였다. 나만 할 일이 많고, 시간에 쫒기는 느낌을 받았다.

오후가 되면 졸음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사무실에는 잠시라도 쉴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 커피를 마시고 세수를 하여도 잠이 왔다. 매일 새벽에 집에 가니 그럴 수밖에. 도저히 못참아서 화장실에서 문잠그고 좌변기에 앉아 10분씩 자고 온 적도 있다.

첫 감사 날이었다. 직원 전부가 밤을 샜다. 오후 2시가 감사였다. 대표님은 오전 9시에 돌아가면서 딱 30분정도 사무실에서 매트깔고 잠을 자게 해주었다. 정신을 바짝차리고 오후까지 버텼다.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공무원 2명이 사무실에 도착하여 우리의 업무 서류를 다 가져오라고 하였다. 정작 우리가 밤새워 메꾼 매뉴얼은 확인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공무원이 사소한 트집이라도 잡을까봐 초조해했다. 공무원은 그날 자기들 퇴근 시간까지 수정할 내용을 가르쳐주며 서류를 제출하라고 하였다. 또 다시 저녁까지 달렸다. 신기한 것은 잠을 딱 30분 자고도 2일째 저녁까지 정신이 멀쩡했다는 것이다. 서류 다 제출하고 저녁에 집에가서야 잠을 11시간 잤다.

공무원들은 퇴근시간을 칼 같이 지켰다. 아마 우리가 늦게 도착했으면 기다리지 않고 퇴근했을 것이다. 공무원들은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자기들 스케줄이 맞춰서 우리 보고 몇 시에 온나, 미안하다. 내가 깜빡했다. 나중에 다시 온나. 미안하다. 서류 하나 빠졌다 다시 챙겨온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우리같은 민간 기관들은 내년에도 사업이 채택되고 정부 보조금을 받으려면 공무원 눈밖에 나면 안되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비참했다. 내가 만약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면 저렇게 갑질을 하고 살았을까? 그들은 그것이 갑질인줄 알까?

2.

일이 너무 많았다. 우리 중에 누구도 결혼한 사람은 없었다. 결혼을 하면 이 곳을 그만두어야 했다. 친구만날 시간도 없었다. 노동법으로 고소해도 이 단체는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이 곳은 실무자들의 ‘마인드’를 중요시 했다. 장애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지,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미미한지, 이 사회가 얼마나 부조리한지 바로 옆에서 보고 있으니, 우리와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직원들도 그것을 안다. 그래서 일이 힘들어도 불평을 최대한 안 하는 것이다.

장애인들 중에 몸이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내 경험으로는, 뇌병변 1급 장애인(뇌기능 이상으로 인해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들을 많이 봤다. 손발을 못 쓴다. 발을 못 쓰는 것은 양호한 편이다. 그건 휠체어를 타면 된다고 치자. 손을 못쓰는 것은 정말 비극이다. 이들은 밥을 혼자서 못 먹는다. 옆에 누군가 있어야 한다. 활동보조인이 없을 때 우리는 자주 이들과 밥을 먹어야 했다. 나 한 입, 너 한 입  밥을 먹는다. 이거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진짜 불편하다. 반찬도 먹여줘야 한다. 이 사람은 어떤 반찬을 자주 먹을까? 내가 적당한 비율로 밥을 주는 거 맞을까? 이런 거 신경쓴다고 내 밥을 제대로 못 먹는다. 그 당시 나 혼자서 편하게 밥 먹는다는 것이 그렇게 소중한 것인줄 몰랐다. 밥 먹고 나면 양치질도 해줘야 한다. 머리 감는 것, 세수하는 것 등 모든 것을 옆에서 누군가가 해줘야 한다.

더 심한 사람은 대소변도 옆에서 누가 도와줘야한 한다. 내가 담당했던 뇌병변 1급 장애인이 한 명 있었다. 소변 볼 때는 바지만 내려주면 되지만, 대변 볼 때는 뒤까지 닦아줘야 했다. 나는 처음엔 소장님께 그 일만은 못하겠다고 진지하게 말할 뻔했다. 그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였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휴지를 있는대로 길게 풀어서 그의 뒤를 닦아 주었다. 계속 하다보니 이것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도 이것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옆에 사람이 없으면 대소변을 참는 경우도 많았다. 그는 매일, 아마 죽을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들은 장애인화장실이 없으면 볼 일을 못 본다. 그래서 몇 시간 소변 참는 것은 그들에겐 일상이다. 의외로 창원같은 대도시에도 그런 편의시설이 안 갖추어진 곳이 많다.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없어서 장애인이 못 가는 식당이나 술집, 커피숍도 많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자. 새롭고 신기한 곳에 가보고 싶은데, 바로 옆에 있어도 못 가는 그들의 마음이 어떨까? 밖에 나가려고 해도 교통수단이 잘 없다. 장애인 콜택시도 한 시간 넘게 기다리는 일이 태반이다. 세상은 생각보다 비정하다.

이 단체에서 일하는 실무자들은 그들과 정서적으로 얽혀있었다. 장애인들과 연애를 하는 비장애인들도 많다. 나는 사랑에 조건이나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때 처음 깨달았다. 그들은 사회에 대한 분노를 함께 느꼈다. 시청, 도청 앞에서 1인 시위, 단체 시위를 밥 먹듯 했다. 나는 열심히 피켓에 쓸 자극적인 문구를 만들었다. 대표님도 내가 사회에 분노를 느끼고, 장애인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난 약간 달랐다. 그들이 불행하다는 것 이해한다. 그리고 사회가 부조리하다는 것도 이해한다. 내가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내가 이기적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내 생활도 중요했다. 내 친구들도, 내 개인적 생활도 중요했다. 책도 봐야하고, 영화도 보고싶었다. 연애도 하고 싶었다. 내 모든 것을 장애인들을 위해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아무리 일을 잘하고, 인정을 받아도 이런 생활은 도저히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내 능력을 다른 곳에 쓴다면 사회에 더 큰 보탬이 될 거란 생각도 들었다. 어느날, 대표님이 하는 얘기를 몰래 들었다.

“원식씨는 여기랑 안 맞는 거 같다.”

경남의 여러 장애인 시설로 실태조사를 나간 적 있다. 전 직원이 다 갔다. 내 차도 동원되었다. 일단 내 카드로 기름값을 결제하고, 나중에 영수증 청구하면 돈을 주었다. 시골로 가는 일도 잦았기 때문에 한번 실태조사를 가면 차가 더러워졌다. 엄청난 거리를 다녔다. 그 사이 엔진오일, 미션오일, 점화플러그 등 많은 부품을 교체했다. 그 비용은 지불되지 않았다. 어떤 실무자는 실태조사에 자기 차가 이용되는 것이 싫다는 이유로 일을 그만둔 경우도 있었다.

한번은 외근하면서 밥값이며, 기름값이며 내 카드로 하도 많이 긁어서 카드값을 제때 못 냈던 경우도 있었다. 현금서비스라도 받으려고 했지만 은행에 갈 시간조차 없었다. 결국엔 엄마가 내 카드값을 처리했다. 일 때문에 바빠서 직원들 월급 이체가 늦어진 적도 있었다. 한번은 거제로 실태조사를 갔다오니 밤 11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날 오전부터 짐 내가 다 들고, 운전도 왕복 4시간 하고, 실태조사도 하고, 회의까지 다 마치고 나니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다음날 오전 6시에 다시 실태조사를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여기를 그만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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