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새내기 때 처음으로 좋아하는 아이를 만나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캠퍼스 커플을 해본 적이 있다. 모든 것이 처음인 설렘과 아기자기함을 안고 나는 그렇게 예쁜 연애를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렇듯이 내 사랑도 많이 서툴렀다. 감정의 균형이 맞지 않았고 그로 인해 작은 균열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삐걱거려 결국 사랑도 무너지고 말았다.
그 이후로 많은 친구와 선배들의 위로 속에서 힘들게 버티면서 지냈다. 보통 이런 시기엔 노래방이나 거리에서 나오는 모든 사랑 노래가 다 자기 이야기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실제로 그때 대부분의 사랑 노래에 애잔한 느낌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울지 않을 만큼 잘 참았다. 원래 내가 슬픈 감정에 파묻히려는 성격도 아니다. 그렇게 그녀를 잘 잊고 지내고 있다고 생각할 즈음, 우연히 거리에서 이런 노래 가사가 들렸다.
‘함께 걸으면 손 닿지 못할 만큼 한참을 뒤에 오던 그녀였죠. 빨리 오라며 그녀를 다그치고 답답한 마음에 난 앞서 걸었는데.. ‘ 고유진, 걸음이 느린 아이 中
그 노래를 듣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잘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주변 모든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걸어갔는데 왜 유독 내게만 이 노래가 그렇게 절절하게 와 닿았을까?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첫사랑 그녀만이 가지고 있었던 습관이 생각나서였다. 그녀는 나와 싸우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땐 항상 나보다 걸음을 느리게 걷는 버릇이 있었다. 이별의 예감이 짙어졌을 때도 그녀는 그랬다. 이런 가사는 나와 비슷한 이별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고, 그 공명이 나를 깊이 파고 들었던 것 같다.
내가 만약 첫사랑 그녀와의 사랑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노래를 들었다면 아무 느낌도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 <김수영을 위하여>란 책을 읽는데 강신주가 이런 말을 하였다. ‘시인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사태들을 회피하지 않는다.’ 이 말은 시인이 사람들에게 피상적이고 보편적인 이별을 노래하는 것보다는 단독적인 경험을 상기시키는 편이 훨씬 더 큰 사랑에 대한 성찰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솔직히 나는 ‘사랑’이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도파민, 세로토닌 정도의 호르몬으로 간단히 정의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난 항상 본질은 단순하고 묵직하며, 현상은 너무 가볍고 쉽게 흩날리는 성질이라 본질적인 것을 더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훌륭한 작가 될 거라고 격려를 해도 내심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 철학적 소재는 언젠가 바닥이 드러날 것이 뻔했고 그러면 글을 더 쓰고 싶어도 쓸 수 없게 될 것이니깐.
하지만 나는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을 보면서 나도 지속적인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았다. 사람들은 이론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이야기보다 내 첫사랑 그녀가 유난히 걸음이 느렸던 것과 같은 개별적인 현상에 더 큰 공감과 이해를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이라면 나만의 경험이 쌓여갈수록 얼마든지 증폭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닌가? 글 쓸 소재로 고민하던 내가 얼마 전 만난 친구에게 ‘이젠 장편 소설도 쓸 자신이 있다’고 호언 장담한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다.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은 내게 희망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