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달리기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몸이 까리진다. 엘리베이터 1층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오후 3시이고 빨리 운동을 마치고 글쓰기 모임 준비, 독후감도 적어야 한다. 할 일이 태산이다. 바쁘다.
배경이 바람처럼 스치고 내 몸이 어디 한 군데 정지한 순간 갑자기 삐리릭~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경찰이었다. 옆에 정차된 경찰차에선 또 다른 경찰이 마이크로 “무단횡단하지 마세요!” 그 확장된 음성이 내 귀에 따갑게 들렸다. 나는 4차선 도로 한 복판이었다. ‘이런 젠장’ 경찰은 내게 빨리 이쪽으로 건너오라고 손짓한다. 가까이 가니 육중한 체격의 그가 멍한 내게 랩 하듯 읊조린다. “도로교통법 몇 조 몇 항 위반하셨습니다. 신분증 보여주세요” “좀 봐주세요” “안 됩니다. 지금 주위를 한번 보세요.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어떻게 봐줍니까? 신호를 잘 지키셔야죠!” 우와 이 경찰 나한테 범칙금 2만 원에 모멸감까지 준다. 정말 최악인 것 같다.
이럴 수가. 나 10년 아무 의식 없이 이 곳을 지나갔는데 갑자기 무단횡단 걸리다니. 가슴이 아렸다. 맥도날드 알바해서 겨우 먹고사는 나한테 이런 일이. 2만 원이면 햄버거 15개는 넘게 배달해야 하는데. 게다가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다. 억울함과 쪽팔림이 한꺼번에 확 올라왔다. 이 세상에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날 따라 무단으로 건넜던 그 길이 운동장만큼 광활하게 보였다. 범칙금 딱지를 호주머니에 신경질적으로 구겨 넣고 다시 달리기를 하기 위해 공원 쪽으로 향했다. 근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달려지지가 않는다. 천천히 걸으면서 아픔을 음미했다. 꽃샘추위가 바람을 타고 더 매섭게 나를 친다.
걷다 보니 공원 입구에 작은 신호등과 또 마주쳤다. 차가 거의 없는 곳이라 생각 없이 그냥 건넜다. 순간 ‘아 나는 금붕어인가? 왜 또 무단횡단을 하는 거지?’ 마음이 아팠다. 이건 그냥 무의식이었고 난 조금 놀랬다. 공원을 돌면서 내 인생을 돌이켜보니 난 정말 상습범이었다. 평소에도 신호를 안 지켰던 것 같다. ‘그래 어쩌면 그 경찰이 이런 내 안 좋은 습관을 고쳐주려고 운명적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공원을 지나 또 다른 신호등과 마주쳤다. 이제는 신호를 지켜야겠다 다짐하고 꾹 서있는데 신호 대기 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지나가는 것 같았다. 차도 시속 1km 정도로 나가는 듯 마는 듯하다. 속에서 열불이 나서 또 무단횡단을 했다. 그런데 이 느낌이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내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이 특유의 영감은 과거와도 이어진다.
중학교 미술시간 기말고사 시험으로 ‘점묘화’를 그리던 때였다. 오로지 ‘점’만으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야 했었다. 나는 온몸을 비틀어가며 점을 쿡쿡 찍어갔다. 그런데 이 짓을 계속해도 도저히 내가 그리려던 심은하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신호등에 서 있는 지금 내 모습처럼 미칠 것 같았다. 난 결국 그 과제를 포기하고 말았다. 희한하게도 내 친구들은 일주일 동안 끝까지 점만 찍어서 멋진 자동차와 인물화도 완성했다.
난 항상 마음이 조급하여 결과나 목적을 바로 앞에 두고 빨리 거기에 닿지 않으면 매우 초조해했었다. 유독 그게 심했던 것 같다. 긴 신호를 기다리거나 느슨하게 한 점씩 그 순간들을 채우기엔 내 인내심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더 자세히 나를 들여다보니 어릴 적부터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렸던 것도 바로 이런 관성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그래 난 인생의 과정을, 잠시 멈춰있는 이 순간과 공간을 온전히 참지 못했던 것이다.
집으로 건너가기 전 마지막 신호등 앞에 섰다. 나는 이번만큼은 꼭 잠시 멈춰 있으리라 결심했다.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이 곳에 서 있던 적이 없었다. 항상 의식은 20m 뒤 밖의 세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20m 조금 더 빨리 이동한다고 하여 삶에 획기적인 변화라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래 인생 뭐 급한 거 있나? 시간이 멈춘 듯한 이 공간에서 이 자체를 즐겨보기로 하였다. 박경철은 자기 혁명은 작은 습관에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는데 어쩌면 이런 작은 멈춤으로부터 그동안 나를 거칠게 조여왔던 불안, 공황, 초조를 내 삶에서 영원히 삭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셀렘을 안고 거창하게 앞으로 내 삶에 주어진 모든 신호를 다 지키겠다는 약속을 스스로에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