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방-여행편]
그럼 같이 가자
여행 전·후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세계여행을 언제부터 꿈꿨냐·어떻게 결심했냐?”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난 사실 세계여행을 꿈꾼 적이 없다. 어릴 땐 먹고 살기 바빴고, 나이를 먹기 시작할 땐 여행에 대한 감흥이 사라졌다. '그 (여행) 비용이면 대신 뭘 할 수 있지'라고 셈하기 바빴다.
직업에 대한 만족도 한몫했다. 뭔가를 발견했을 때의 쾌감과 끊임없이 경쟁해야 한다는 자극이 마약과도 같았고, 그게 날 묶어뒀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치던 순간이면 이해되려나.
큰돈을 버는 것도 아녔다. 기자들이 화려해 보이는가? 언론사는 사해보다 짜다. 마른 수건 짜듯 일 시키고, 한잔 술로 보상하는 게 자연스러운 곳이다.
본론으로 돌아오자. 베트남 출장과 일본 여행이 전부였다. '세계여행'은 누구보다 멀고, 낯선 주제였다. 누군가 배낭 여행담을 쏟아 내면 눈만 껌뻑거리기 바빴고, 교환 학생 시절 썰을 풀면 영혼 없는 호응을 했다.
난 세계여행을 갈 거야. 적어도 1년 정도
연애 시작 한 달째, B의 말이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은 듯 사고가 정지했다. 입술이 달싹거렸다. 하지만 성대가 결절된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때렸고 길면 5초의 시간 동안 '당황·좌절·분노·슬픔'이라는 다양한 감정이 스쳤다. 당시 나의 뇌는 '세계여행'을 '헤어짐'으로 공식화했다.
1차원적 도출은 어색함을 남겼고, '세계여행'은 터부시하는 단어가 됐다. 그런데 알지 않나? 이건 내 마음일 뿐. B는 자신의 꿈을 키웠다. 서로 웃고 있지만 본질은 '동상이몽'이다.
나에게 B는? 상실에 대한 고민은 나를 변화시켰다. '함께'라는 가치를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비혼을 생각한 나에게 엄청난 변화였다.
세계여행? 그래, 같이 가면 되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생각이 바뀌니 모든 게 편했다. '금기'는 사라지고 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회포를 풀듯 그동안 쌓였던 얘기를 쏟아냈다. 마치 내 삶을 두고 바람 난 것처럼.
변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던 것인가? 아니면 비겁한 변명이었나. 불어오는 바람에 밀린 배는 전혀 다른 항로를 찾기 시작했다. 180도 바뀐 내 태도에 B조차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도 순풍이었다.
회사는 어느샌가 맞지 않는 옷이 됐다. 금요일 저녁 퇴근길, 퇴사를 결정했다.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직장인들은 바삐 움직였다. 나는 '끝'을 위해 회사로 향했고, 발걸음은 남들보다 가벼웠다.
"부장, 저 할 말이 있는데요" 출근길 마주친 부장에게 건넨 첫마디. 슬쩍 나를 본 부장은 '천천히 얘기하자'고 권했다. 얼굴에서 무언가 티가 났을 수도 있고 사회생활로 미뤄 짐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기다릴 필요도 없고 타협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10분 후, 커피숍에 앉은 우리 사이엔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저 퇴사하려구요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퇴사를 고민한다'도 아니고, '퇴사를 하겠다'고 통보했다. 신기하게도 상실감·두려움이 아닌 즐거움·기대감이 복합적으로 자리했다.
-왜 무슨 문제가 있니? 결혼도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기자가 제 길인지 판단도 잘 안 서고, 새로운 걸 도전하고 싶고 그래서요"
질문을 쏟아냈지만, 별달리 답하지 않았다. 단순한 궁금증·걱정·전달 목적. "어느 것을 고를까요? 알아맞춰 봅시다. 딩동댕." 오후부터 나머지 연차를 소진하겠다고 전했다.
나의 퇴사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어디로 이직하지?'라는 물음표가 사람들 눈에 맺혔다. 역시 발 없는 말인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남은 건 행정 절차. 사직서 내 '퇴사자 정보보호 서약' 동의 후 부장 결재를 받았다.
국장의 호출이 이어졌다. 이때쯤 비어 있던 퇴직 사유를 채웠다.
퇴직 사유: 세계여행
-왜 그만두려고?
"세계여행 가려구요"
국장은 조금 전 슬쩍 보고 내렸던 사직서를 다시 들었다. 황당하다는 국장의 눈빛과 처음 듣는 얘기라며 당황한 부장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사슴까지는 아니더라도 순진한 눈빛으로 '왜요? 무슨 문제 있나요?'를 외쳤다. 매일 보는 눈치를 퇴사하는 날까지 보고 싶지 않았다.
수년간 뼈 빠지게 일했던 직장의 퇴사는 수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조금 과장하면 담배 한 대 피울 시간 정도. 그리고 빠져나온 회사. '시원 섭섭'의 의미가 오롯이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퇴사 소식'은 업계로 퍼졌다. SNS와 전화로 수많은 연락을 받았다.
왜 회사를 그만뒀냐?
결혼까지 한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앞으로 뭐 하고 살 생각이냐?
돈은 있냐?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 많은 관심이 쏟아졌고 일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삐딱하게 보는 사람은 어떻게든 그렇게 본다'로 떨쳐냈다.
가장 황당한 건 '로또 당첨'이다.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근데 '로또는 로또다'. 내 인생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사람을 만났으니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