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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비곰 Dec 22. 2020

'방심하다' 추억을 잃고 얻은 배움

[시간이 멈춘 방-여행편] 


방심했다


마음을 다잡지 아니하고 풀어 놓아 버림. 방심(放心)의 사전적 의미다. 하지만 나의 방심은 '곧 뼈저리게 후회할 것'으로  정의된다. 서로 쓰이는 모양이 다르지만 인과에 놓인 얘기다. 방심의 전제는 교만이다. 그리고 필요한 건 '찰나의 순간'이다. 



유럽은 연합이라는 큰 제국의 모습이다. 서로 간의 경계는 있지만 국경의 의미는 모호하다. 나라를 넘나드는 게 쉽다. 검색과 신분증 검사만 놓고 보면 서울에서 제주 가는 수준이다. 교통편은 선택이다. 누군가는 돈이 많아 비행기를 선택할 수 있고, 누군가는 자신의 체력에 온전히 기댈 수밖에 없다.


서유럽에 위치한 프랑스와 스페인. 지중해를 끼고 서로 맞닿아 있다. 정확히는 프랑스 남서부와 스페인 북동부. 이들 나라의 규모는 우리의 5배 정도로, 일부 지역 간 이동에 필요한 시간이 상당하다. 프랑스 중북부에 위치한 파리에서 스페인 북동부에 위치한 바르셀로나까지의 거리는 1,000km. 이동 시간은 비행기로 1시간 40분,  버스로는 10시간이다.


이 정도 시간이면 최고급 프리미엄 버스를 기대하겠지만 실상은 우리의 우등 버스만 못하다. 10시간 동안 딱딱한 의자에 구겨져 간다. 곡소리가 절로 날 수밖에. 그래도 다행인게 이 동네 사람들 기본 덩치를 생각한 좌석 크기다. 고속 열차도 있지만 비용 탓에 논할 수준은 아니다. 오늘의 절약이 내일의 또다른 즐거움을 가져온다. 




늦은 밤, 파리에서 출발한 버스. 도로포장에 맞춰 미친년놈처럼 춤을 췄다. 실내조명은 모두 꺼졌다. 계기판에서 쏟아진 빛만 운전기사의 얼굴을 밝혔다. 앞 가방을 끌어 앉은 채 의자에 몸을 구겨 넣었다. 이따금 들리는 마른기침 소리. 칠흑 같은 어둠이 차창 밖으로 흘렀다. 프랑스의 마지막은 그랬다. 


'구름 속 숨어있던 달인가.' 얼굴로 전해지는 빛무리에 눈꼬리를 올렸다. 피식. 환했던 그 자리엔 화장실 입구 센서 등만 빛났다. 적막을 깨는 화장실 변기 물소리. 모든 이들의 방광을 자극한 것인가. 한동안 화장실 러시가 이어졌다.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다. 허리를 펴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손바닥만큼의 공간이 전부였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살폈다. 출발한 지 고작 2시간 지났을 뿐. 목적지까지 4배의 시간을 더 버텨야 했다. 반쯤 뜬 눈을 감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찌릿한 느낌이 다리를 타고 척추 끝에 도달했다. 


한 자세로 오래 버틴 탓인가. 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팔다리를 주물렀다. 1시간이 더 흘렀다. 하지만 버스 내 적막감까지 모든 게 그대로였다. 남모를 강박 탓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버스의 출렁임에 맞춰 한 번씩 눈 떠 주변을 살폈다.


시간과 정신의 방에 갇힌 건가. 먹은 게 없던 탓에 자리에서 일어날 일이 없었다. 몸을 뒤틀며 생각했다. '한자리에 10시간 동안 갇혀 있다는 건 미쳐버리기에 충분한 조건이야'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더이상 버틸 수 없다'라고 절규할 때. 거짓말같이 여정이 끝났다.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

 

바닥난 체력과는 반대로, 무책임함과 이기심이 뒤엉킨 감정이 자라났다. 80리터짜리 배낭 1개. 앞 가방 1개. 손에든 가방 2개. 목에 건 카메라 가방 1개.  지구를 들고 있던 아틀라스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나'라는 거치대에 가방이 걸려있는 모습으로 스타벅스에 도착했다.


커피 한잔과 와이파이, 그리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주는 안도감에 취했다. 내 몸을 짓누르던 전생의 업보를 바닥에 내렸다. 그 많은 짐들은 4인용 테이블 가득히 쌓였다. 주위를 둘러볼 힘도 남지 않았다.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B가 커피를 주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 후. '땡그랑' 누군가 물건을 떨어트렸다. 쳐다보지 않았다. 불안한 눈으로 짐을 살폈다. '땡그랑' 또 들려왔다. 어깨를 치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돌아봤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바로 할 때쯤, 누군가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뭐지' 고민했다. 그리고 다시 훑었다. 큰 배낭 2개. 내 가슴팍에 앞 가방 2개. 손에 드는 봉지 4개. 다 있는 건가? 그리고...뭐였지. 없었다. 갈색의 카메라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였으면 앞 가방에 비나로 연결돼 있을 카메라 가방이 없었다. 방심이 필패를 불렀다. 


소매치기에 누구보다 민감했지만 작업당했다. 2인 1조의 강도였다. 두 차례나 동전을 떨어트렸음에도 반응이 없자 끝내 터치로 시선을 빼앗고, 또 다른 누군가가 값비싸면서 가벼운 카메라 가방을 훔쳐 달아났다. 문제는 카메라가 아녔다. 백업을 못 해 둔 메모리 카드였다. 


소매치기 입장에서 가장 먼저 버릴 메모리 카드가 우리에겐 현금을 주고라도 되찾고 싶은 물건이었다. 몇 개 나라의 추억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돈의 문제는 나중 일이다. 


안다. 백업의 중요성.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멍청했다. 한달살기를 하며 나태해졌다. 방심은 방심을 불렀다. 이동하지 않고 정착하니 '타협'이라는 보기가 생겼다. 떨리는 B의 눈엔 큰 상실감이 드리웠다. 눈빛을 애써 지운 B는 나를 위로했다.


스타벅스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CCTV를 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불가'. 우리나라와 같다. 경찰 입회하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그게 법이니 어쩌겠나. 경찰서 위치를 묻고 발길을 돌렸다. 배낭이 더 큰 무게로 날 짓눌렀다.


경찰서 유리문 너머로 긴 줄이 보였다. 대충 봐도 십수명. 한쪽에 울고 있는 여성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일단 꼬리를 물고 섰다. 종이를 받아든 앞사람들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우리 차례다.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경찰이 우리의 설명을 듣곤 종이 두장을 건넸다. 기계적인 행동 뒤엔 기계적인 설명이 따라왔다. 


"너희가 잃어버린 장소와 시간, 그리고 물품을 자세히 적어. 그럼 끝이야"


그제야 알게 됐다. 지금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소매치기 피해자라는걸. 오전 10시. 고작 브런치 타임인데. 아주 부지런한 X새들이다. 기억을 더듬어 써 내려 가길 한참. 한 여성이 울부짖으며 경찰서 문을 열었다. 바닥에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동병상련.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안쓰럽게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종이 서류의 빈칸을 빼곡히 채웠다. 


"CCTV는 언제 보러 갈 수 있나요?" 다시 줄 선 우리가 서류를 내밀며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나중에". 딱 거기까지였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우리에게 "돌아가. 뭔가 있으면 너희 연락처로 전화할게. 다만 너희 번호가 살아있다면..." 경찰의 입꼬리가 올라간건 내 착각인가.


물건을 찾아주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내가 간절함을 보인 사건이 그들에겐 하루에도 수 십건, 아니 수 백건 발생하는 그저 그런 외국인 대상 소매치기 사건인 거다. 보험 처리용 리포트 작성이 전부다. 소매치기단을 소탕할 수 없는 그들의 해결책이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느꼈던 스페인은 사라졌다. 이질적인 감정이 되살아났다. '무적함대'라는 이름으로 온갖 약탈을 일삼았던 그들이다. 잠시 잊었다. 세계 최강국이라고 자부했던 곳이 도둑놈들의 소굴이 됐다. 막지 못해 방관하는 모습이 더 나빴다. 


정제되지 않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다 가라앉았다. 당연하게도, 잃어버린 건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기억은 계속된다. 방심한 사이 한대 세게 맞았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비싼 돈 주고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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