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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비곰 Dec 25. 2020

'기억하다' 불편만 남은 짧은 동거

[시간이 멈춘 방-여행편]

내돈내산=내 돈 주고 내가 산


요즘 온라인 세상엔 '내 돈 주고 내가 산 제품 또는 서비스'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과거 리뷰라는 형식의 글이 많았지만 엄연히 구분된다. '내가 어떤 이유 때문에 제품을 샀는데'로 시작해서 '너무 좋았어요'의 찬양 수준 글 맺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돈내산은 직접 비용을 지불한 뒤 장단점을 따진다는 데 유의미가 있다. 장점은 있는 그대로, 단점도 있는 그대로. 다만 광고받고 싸지른 똥처럼 호들갑 떨지 않는다. 단점엔 절대 너그럽지 않다. 돈을 냈으니 굳이 타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독자의 신뢰성을 높여 페이지 유입이 늘 수 있지만 초기 투자 비용이 필요하다.


재화·용역을 구매하는 모두가 내돈내산 할 필요는 없다. 키워드 검색. 말 그대로 성실하게 잘 찾으면 된다. 내돈내산 콘텐츠는 쌓이다 못해 범람할 수준이니, 해당 블로거나 유튜버만 찾으면 기회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내돈내산'이 만능 치트키는 아니다. 콘텐츠마다 급이 다른 탓이다. 같은 고추라도 '청양고추'처럼 매운 놈이 있는 반면 '오이 고추'처럼 매운맛 없이 아삭함만 남은 것도 있다. 아마도 글쓴이나 화자의 성향이 반영된 결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때문에 정보의 분리 과정이 필요하다. '어떤 정보가 조금 더 유의미한지'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서 기회비용 차가 발생할 것이다. 분리 과정은 섬세한 교차 검증으로 진행된다. 단일 정보만으론 정보의 질을 높이기 어렵다.




여행에 내돈내산을 적용한다면


실상 여행 중 멍청 비용이 발생하는 일이 잦다. 그만큼 기회비용으로 잃는 게 많다. 정보의 비대칭성. 언어의 다름에서 오는 문제부터 서로에 대한 목적의 다름까지. 같은 말을 쓰는 한국에서도 장사꾼한테 당하는데,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선 어떡하랴. '눈뜨고 코베이다'가 기본 옵션이다.


'쫄보'인 나처럼, 일부 여행자에게 내돈내산은 후순위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정보를 찾고 또 찾는다. 하지만 모든 게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다. 최대한 완벽하다고 포장된 글을 찾거나 '이게 최선이야'라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 정보를 취합한다. 이 정도 했다면 일단 부딪혀 봐야 한다. 그리고 '신께서 함께하길'. 기도해라.


때문에 정부 공식 사이트나 글로벌 회사를 주로 이용한다. 약관에 리펀 등으로 리스크 헷징이 가능한 문구가 있는지 우선 파악한다. '일단 몸으로 부딪혀 봐야 한다'는 경험 우선주의 여행자조차 기본적인 정보는 얻고 행동한다. 이들은 내 몸을 담보할 순 있지만 비용은 발생하지 않길 바란다.


여행자에게 리스크는 생각보다 더 큰 결과로 돌아올 수 있다. 돈을 잃을 수 있고, 상처 나고 부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을 수 있어 경각심이 필요하다. 내돈내산은 누군가에게 최후의 보루다. 그들은 '내돈내산'의 과실이 열리길 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나도 그 한 명이다.




짧은 동거...돈 주고 산 불편함

하지만 내 맘 같지 않다. 여행의 돌발 변수는 많다. 숙소. 교통. 날씨. 아닌 게 뭔가 싶다. 그중 가장 큰 리스크는 현지인이다. 주관적 판단이지만서도. 그들은 내가 예측할 수 없는 존재다. 만남은 감정의 찌꺼기를 남긴다. 때론 찌꺼기조차 남지 않는 관계도 있지만.


스페인에서 '눈보다 빠른 손'을 만난 뒤 일이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예약한 에어비앤비 숙소로 향했다. 전생의 업보인 배낭이 그날따라 더 어깨를 짓눌렀다. 이국적인 건물이 주변에 즐비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오는 한숨과 보이는 건 오래전 만들어진 돌바닥뿐. 분노. 슬픔. 정리되지 않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 한참을 걸어 숙소 정문에 도착했다. 지이이잉~.  벨소리조차 힘없다. 쿵쾅거리는 걸음 소리와 함께 계단을 따라 젊은 남성이 내려왔다. "올라(안녕)" 우릴 보며 웃었다. 동거인과의 첫 만남. 어색한 인사를 뒤로 한 채 계단을 따라 올랐다.


마침내 도착한 숙소. 배낭을 내렸다. 각자의 소개는 우리에 대한 위로로 마무리됐다. 소매치기를 만났던 상황부터 경찰서를 방문했던 것까지. 말을 통한 감정의 배설로 마음의 소용돌이는 잦아들었다. 이곳에서 보내 게 될 3박 4일. 쉽지 않을 것 같던 그 시간에 작은 숨구멍이 생겼다. 돌이켜보면 착각이었지만.


바르셀로나에서 우린 방 한켠을 렌트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룸 컨디션과 비용 앞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 아침의 경험 탓인가, 옵션에 있던 방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덜컹덜컹' 나무 문에 달린 경첩이 흔들렸다. 당장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겠지'


작은 기대조차 사라졌다. "미안, 여긴 열쇠가 없어" 호스트의 한마디. 본인 방 열쇠는 있지만 손님방 열쇠는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바르셀로나에 소매치기가 많지만 우리 집은 안전해" 이걸 자랑이라고 한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어 욕지기가 쳐 올랐다.


충전을 위한 휴식이 필요했다. 아침부터의 감정 노동을 생각하면 철야를 넘어 한계 상태였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할 수 있는 것보다 하지 못하는 게 더 많았다. '에어비앤비 옵션과 리뷰는 개나 줘버려'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 남들의 '내돈내산'과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아주 주옥같은 상황이.


첫날 저녁, 동거인이자 호스트는 친구를 불렀다. 저녁 6시. 만찬을 준비했다. 고기를 굽고, 야채를 볶고. 정신없이 요리를 준비하고 요리를 했다. 2시간이 흘렀다. 친구와 함께 거실 소파를 차지했다. 넷플릭스가 가입된 TV를 켰다. 영화를 본다며 거실과 부엌 사이에 설치된 커튼을 쳤다. '아 맞다. 넷플릭스도 옵션이라고 했는데.'


그저 지켜만 봤다. 편하지 않았다. 일방으로 통보를 받고, 행동을 강요받았다. 거실이 커튼으로 분리되자 우린 방과 부엌만 오갈 수 있었다. 식탁도 없던 주방. 남은 건 포크 몇 개와 팬 하나. '꼬르륵' 신호가 들렸다. 배낭 깊이 숨겨진 라면을 찾았다. 여행 중 한국 라면은 짠내가 아니다. 비상식량이자 외식이다.  


둘째 날도 그랬다. 친구가 놀러 와 만찬을 즐기고 사라졌다. 영화를 본다며 커튼을 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돈을 내고 불편함을 샀다. 그리고 호구가 됐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건가.' 아침이 되면 세상 친절함을 갖춰 "친구들이 갑자기 놀러 온 거야.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 사과했다.


마지막 날. 길어진 만찬에 그 녀석이 만취했다. '띠이~띠이~' 저녁쯤 돌린 세탁기가 멈췄다. 알람 소리가 거슬렸나. 호스트는 세탁기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렸다. '위이이이이잉~덜컹덜컹' 다시금 요동치는 세탁기. '탕탕탕탕탕탕' 거친 모터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호스트는 우리에게 친숙한 욕을 쏟아냈다. 그 속엔 우리를 지칭한 단어가 알알이 박혔다. '쾅쾅쾅' 손으로 무언가를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힐끗' 잠기지 않는 문을 보며 숨 죽였다. '취했는지 제정신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저 더 큰일이 없길 바랄 뿐이었다.


다음날. "내가 어제 잠이 덜 깬 상태로, 약간 몽롱한 그런 상태. 알지? 무슨 행동을 했는데. 미안해. 이해해줘" 범죄자들이 흔히 내뱉는 대사가 그 녀석 입에서 흘러나왔다. 대꾸하지 않았다. 고개만 저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탓이다. 배낭을 챙겼다. 그 녀석은 없었다. 숙소를 나와 발걸음을 옮겼다.


 호스트의 후기가 등록됐습니다.


호스트와 슬픔이 1도 없는 작별을 했다. 이러기도 쉽지 않은데. '시원 섭섭'에서 시원만 했다. '띵동. 호스트의 후기가 등록됐습니다.' 이동을 위해 바삐 움직이다 들려온 알람. 무심히 클릭했던 후기에 손이 떨렸다. 후안무치라는 단어를 아는가. 낯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름. 후기를 읽는 내내 든 생각이었다.


요약하면 '게스트가 숙소 도착 후 잠금장치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고, 나를 범죄자 취급했다. 늦은 밤 세탁기를 돌리고 전자 제품을 고장 냈다. 우린 집에 온 다른 손님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너무 불쾌했다. 예의가 없는 사람들이다.'다.


에어비앤비의 경우 호스트와 게스트 모두 후기를 남길 수 있다. 감정적으로 대처할 게 뻔한 호스트와 싸울 이유가 없었다. 에어비앤비에 그 녀석과 나눈 SNS 메시지를 첨부해 의견을 보냈다. 에어비앤비 측은 '호스트가 악의적으로 후기를 남긴 것으로 의심가지만 운영 원칙 상 호스트 후기는 삭제할 수 없다'고 답했다.


후기에 댓글을 다는 것만이 방어권의 전부였다. 너무 황당했다. '왜 지금 이걸 써야 하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댓글을 달았다. 벌게진 눈. 떨리는 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끝까지 좋은 기억을 남겨주지 않는다.'


공들여 후기를 찾아간 곳이지만 이 정도면 정말 답이 없다. 일단 마주해야 답이 나오는 곳이었다. 감정의 찌꺼기 조차 사치였다. 내돈내산의 짧은 동거는 나쁜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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