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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된 재난과 폭력, 그리고 자본주의

경북 산불, 싱크홀, 미세먼지, 윤 탄핵 이슈 등에 부쳐

by 이일리


날이 많이 풀렸다. 미세먼지가 심해 하늘은 뿌옇다. 그저께 남태령에서는 경찰과 농민 그리고 연대하는 시민들이 밤을 새워 대치했고, 이재명은 2심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 무죄를 선고 받았다. 오늘은 트럼프가 내달부터 외국산 차에 25% 관세를 붙이겠다고 발표했다는 뉴스도 나왔고, 헌재의 윤 대통령 탄핵 선고는 지연되고 있다. 사흘 전 명일동에는 4차선 도로 너비의 거대한 싱크홀이 생겨 라이더 노동자가 죽었고, 경북에서는 산불이 며칠 째 번지고 있다. 산과 나무와 풀꽃, 산에 살던 동물들, 오랜 역사의 흥망성쇠를 견뎌낸 사찰들과 구백 살이 넘은 은행나무가 불에 탔다. 집을 잃은 사람들은 면사무소로 대피했고, 줄에 묶여 홀로 남겨진 개들도 있었고, 수십 명의 노인들이 불에 타거나 질식하여 사망했다.


살아 있는 일이 겸연쩍게 느껴진다. 아침에 눈을 떠 밥을 해먹고 빨래를 하고 애인을 만나 공부를 하고 단단한 거리를 걷고 잠자리에 누워 내일 할 일을 계획하는 이 익숙한 일상에 이질감이 든다. 해러웨이의 책을 뒤적거리며 “복수종 생물들과 동맹하고 친척을 만들어야 한다”느니 “지구의 수많은 반려종들과 공산 공생하는 삶의 양식을 회복해야 한다”느니 하는 내용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도무지 모른다. 산불 피해 복구 긴급구호 모금에 기부를 하거나 탄핵 촉구 광화문 행진에 참여하는 것이 ‘노동자, 소수자, 동식물, 무생물들과 공생하는 삶의 양식’이냐고 물으면 상당히 머쓱해진다. 개별적 재앙들이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아 한 나라가, 온 지구가 폐허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의 도저한 무력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뿐이다. 균열의 순간을 감지하고 온전히 경험하는 일을 나의 뻣뻣한 일상과 병행하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던가. 줄곧 의식적으로 무감해진다.


산발적인 불합리들이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모아질까 싶어서 지극히 사회학적인 진단과 명명을 해본다. 국가주의적 발전주의, 반민주적 독재, 경직된 권위적인 관료제 문화와 행정, 과도한 사법화와 무전유죄 유전무죄 판결, 제1세계 국가들의 신식민주의적 횡포, 반생태주의적 난개발과 환경 위기, 재난불평등... 이렇게 적고 보니 어디서부터 손 대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너무 크다. 어제오늘 뉴스에서 건조하게 보도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대자본에 의해 거시적인 수준에서부터 아주 미시적인 수준까지 위계화되어 지속 불가능한 상태로 망가져가는 지구, 그 안에서 터져나오는 신음들이지 않나. 언제나처럼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특히나 이 모든 재난에서는 빈곤층과 노동 계급이 가장 먼저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이윤을 위한 극한 경쟁으로 치닫는 자본주의 근본 동역학이 존속하는 한 착취, 폭력, 차별, 파괴, 기만, 독재는 사라지지 못할 것이다. 다른 세대, 인종, 생물종에 대한 죄책감과 무력감에서 비롯된 집합우울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고통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궁극적으로 무엇을 겨냥해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들여다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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