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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현의 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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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혜 Sep 05. 2024

장마와 우산의 행방불명

240707-0709

우산을 잃었다. 정확히는 아이보리 우양산이다. 구매한 제품은 아니다. 친구가 하나를 줬다. 선물 받아 양산 둘 생겼다고. 냉큼 받았다. 하는 짓이 끼리끼리다. 하나가 생기자 하나를 버렸다. 늙은 양산이었다. 재작년 생일 선물이었다. 하늘과 하양의 배치를 아꼈다. 수납하기 적절한 크기였다. 이 년 동안 볕을 가렸다. 비를 막았다. 풍파를 고스란히 맞았다. 그늘을 선물한 대가를 치렀다. 우산대 마디가 저들끼리 걸렸다. 나오지 않았다. 태곳적보다 한 단 짧아졌다. 챙 넓은 모자처럼 이고 지고 다녔다. 갓파 같은 모양새였다. 만난 사람마다 웃음을 뿌렸다. 그랬는데.


이제 양산은 없다. 새로 들인 녀석 행방은 석연치 않다. 잃었을까, 도둑맞았을까. 동선을 추적한다. 퇴근길은 부슬거렸다. 보도블록은 질척였다. 차듯이 걸었다. 현관문 고리에 젖은 우산을 걸었다. 빗물을 복도에 떨궜다. 발레 수업 예정이었다. 추적추적 체육관을 향했다. 끈을 손모가지에 둘렀다. 달랑달랑 흔들었다. 비 냄새를 맡았다. 우천도 나쁘지 않네, 나름 매력적이다, 괜찮은 문장은 치사하다, 불쑥 튀어나오고 예고도 없이 사라진다, 따위를 머릿속에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계단으로 사 층까지 올라가면 헬스장이다. 쓰고자 마음먹으니 눈 닿는 장면들이 재미났다. 세 사람은 나란히 사이클에 앉았다. 반바지 차림이었다. 철 지난 뽕짝이 울렸다. 똑같은 박자로 페달을 밟았다. 날 선 종아리가 일정하게 휘적댔다. 지휘자 부재한 합주가 훌륭하다. 발목을 안쪽으로 당겼다. 허벅다리를 앞뒤로 찢었다. 장요근을 늘였다. 일 층 GX 룸으로 향했다. 우산을 계단참에 두었다. 명백히 기억한다. 어제(0708) 20:54 까지는.


일어나자마자 짐을 꾸렸다. 부천에서 머물 나흘 치다. 그때 유실을 알았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첫째, GX 룸에 그대로 두었다. 둘째, 현관문에 걸어둔 우산을 누군가 가져갔다. 전자 가능성 농후했다. 오전에 체육관을 다시 찾았다. 시간과 장소를 짚었다. 분실물은 없댔다. 슈뢰딩거 고양이가 후자를 기웃거린다. 상당히 찜찜하다. 어젯밤인가 오늘 아침인가, 현관문 쪽에서 부스럭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설마 누가 가져가겠어, 다들 복도에 내놓는데, 생각하며 끈을 위태롭게 걸친 기억도 난다. 상상인지 실제인지 아리송하다. 오 층 입주자를 믿을 수 없다. 의뭉스러운 뒷맛이 남는다. 얄팍하게 낡아빠진 민트색 우산을 마지막으로 챙긴다. 출입문을 평소보다 단단히 잠근다. 지하철로 향한다. 땀이 분수처럼 솟는다. 노인 무리를 본다. 자줏빛 등산복이 진댈래꽃보다 화려한, 스크린도어 맞은편 의자에 게딱지처럼 다다다닥 눌어붙은. 엉덩이를 삐죽 들이민다. 침침한 유리에 거울상이 비친다. 굽은 등이 망연히 열차를 기다린다. 전부 복제된 템플릿 같다. 생이 비슷하게 뻔하다.


그래, 다들 깨달은 게지, 양산 없이 여름 날 수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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