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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혜 Nov 23. 2023

Day 5 새로운 탐험을 향해

소도시 올로모우츠로

내 여행의 아침 루틴은 눈 뜨자마자 오늘 하루의 여행을 하나님이 인도해달라고 기도로 맡겨드리기, 그리고 성경 말씀을 읽는 것으로 이어진다. 읽으면서 내게 보내주시는 메세지가 무엇일까 살피고 묻고 나면 마음이 밥을 먹은 것처럼 든든해진다.

내 영혼을 위한 식사 냠냠

오늘은 첫 여행지 프라하를 떠나서 이웃 도시 올로모우츠 Olomouc 로 이동하는 날. 프라하를 떠난다는 아쉬움을 달래려고 새벽 카를교를 한 번 더 보러 가야겠다. 한국에 살다가 유럽에 오면, 새벽형 인간이 되는 것이 매우 쉽다. 시차가 달라서 거의 강제로 새벽 기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아직도 현금 인출을 못 했다. 여기는 수도라서 식당 및 가게에서 카드 결제가 가능한데 소도시로 갈수록 현금만 받는 가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수수료가 붙는 KB뱅크(국민은행 아님) ATM을 찾아야 된다. 나름 안전을 위해 ATM 위치도 고르고 있는데 너무 길 한가운데 외부에 노출된 곳은 잘 안 가려고 한다. 혹시 모를 도난의 위험을 막으려고. '하나님, 현금을 어디서 뽑으면 좋을까요?' 단단히 따시게 입고 지하철 내려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단에 딱! 마주친 KB뱅크 ATM ! 너무 신기하다. 너무 외부에 노출된 곳도 아니고 후미진 곳도 아닌 적당한 위치! 아, 여기서 뽑으라고요? 알겠습니다~ 익숙한 우리 나라를 벗어나면 진짜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님께 물어보게 되는데 이럴 때 즉각적으로 대답해주시는 걸 경험하는게 재밌고 감동으로 다가온다. 뭔가 너무 스케일이 크신 하나님이셔서 커다란 일에만 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알고계셔서 나와 더 세밀하게 친해지고 싶어하심이 느껴지는 이유다.

주님, 현금을 뽑았나이다 (200코루나가 12,000원이 좀 안 된다. 1000코루나 단위로만 인출 가능)
새벽을 가르는 일출원정대

카를교에 도착하니 아직 밤의 기운이 가시지 않아서 더 좋다. 아무도 없는 야경을 독차지 하는 기분이랄까. 6시쯤이었는데 이리저리 방방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다보니 어느새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인적 드문 새벽 카를교 (낮에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블타바 강에 비치는 밤과 아침 사이 풍경
새벽 달
사진 작가님들이 열심히 작품 활동 중
사진작가님이 찍었던 위치에서 따라 찍으니 이렇게 나왔다.

오늘도 명확한 일출은 못봤지만 카를교에 인사 했으니까 그걸로 됐다. 숙소 돌아오는 길에 분주한 프라하 시민들의 출근 풍경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그들에게는 생활의 터전, 내게는 꿈같은 여행지.


체크아웃하고 숙소 바로 앞에 있는 프라하 중앙역으로 기차 타러 왔다. 오늘부터 기차 이동 대장정이 시작되는 것. 7번 정도의 도시 이동이 있을 예정이다. 지난 번 여행 때는 기차 이동이 거의 없어서 겁이 좀 나지만 쫄지말자, 붐빌 때 가방 도난 조심하고 내 기차 플랫폼만 잘 찾으면 된다. 유럽은 각 나라마다 운영하는 기차들이 있고, 또 민간 회사도 있어서 기차역에 가보면 그야말로 각국 기차 만남의 광장이나 다름이 없다. 오늘 탈 기차는 레지오젯 이라는 체코 회사의 기차.

프라하성을 대형 레고로 만들어 중앙역에 전시해뒀다. 안에 불도 들어오고 엘리베이터도 움직인다. 신기해라

프라하 중앙역 레고도 있다!


샛노란 병아리 레지오젯 기차

1등석을 예약했는데 가죽 시트에 좌석도 넓다. 내 캐리어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천장 선반이 너무 높아서 도저히 캐리어를 못 올리겠다)두리번거리니 맞은편 앉은 체코 청년이 옆에 좌석간 사이 끼워놓으면 된다고 가르쳐줬다. 고맙습니다.

내 자리 / 중간에 잘 안착한 내 짐들


레지오젯 1등석은 신문이랑 물이랑 일리 커피도 주셔요. 승무원 분이 커피 종류와 요깃거리 주문을 받으십니다.  
기차에서 먹는 카푸치노와 크로아상 샌드위치
창문을 닦아주고 싶은 풍경과 여행 일기 집필 현장

올로모우츠 역에 도착해서 트램을 타고 숙소로 찾아오니 프라하와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체코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뉘는데 <보헤미아>의 수도가 프라하고, <모라비아> 지방의 수도가 올로모우츠였다고 한다. 지금은 프라하가 수도이지만, 아무튼 옛 명성은 간직하되 아름다운 도시라고 해서 와봤는데 평화롭고 한적해서 좋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에서의 도난 걱정은 조금 접어둬도 될듯. 긴장이 노곤하게 풀린다.


후기에 칭찬이 자자하던 숙소 Long Story Short Hostel로 찾아왔는데 수많은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외관부터 감탄이 나온다. 우와 이런 데서 잔다고? 난 벌써 올로모우츠가 마음에 들어버렸다. 체크인 시간은 아직 멀었으니까 얼른 짐만 맡기고 탐험을 떠나자.

(클릭해서 자세히 보면) 트램이 콧수염을 달고 있어요
중앙 마당이 멋진 숙소
돌바닥이었지만 괜찮아.

여기도 가을의 한 가운데서 잎들이 한창 의상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벽화도 멋져
독특한 건물에 알아보니 옛날에 벙커처럼 사용되던 곳이란다. 지금은 지붕 잔디에 물 주시는 중
초록 지붕아 잘 자라거라
날씨 따라 마음도 화창

처음 가본 곳은 <Revolution 혁명>이라는 조각이었는데 벨벳혁명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비폭력 혁명으로 공산당 정권이 무너졌다. )을 모티브로 만든 다비드의 작품이란다. 8만5천 여 개의 중고 열쇠를 모아 만들어졌는데 특이하고 멋지다. 구글에서 정보를 찾아보니 작가가 혁명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며, 혁명 이후 사회를 비판하는 것도 아닌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내용이라고 한다.

예술은 녹슨 열쇠도 메세지 전달의 도구로 만들어준다

실내로 들어가기 아쉬운 날씨라 주변 공원을 산책했다. 큰 규모의 공원들이 몇개가 연이어 붙어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집 같아서 지도를 보니 이비인후과 래요..

그런데 이 공원에서 신기한 나무를 발견했다. 나무가...위로 자라는 게 아니라 양 옆으로 그것도 가지가 바닥에 닿은채로 자라고 있는 거였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어서 주변의 체코 시민 붙잡고 이거 살아있는건지 물어보기까지 했다. 웃으면서 자라고 있는거라고 하셨다.

이 나무를 보고 있으니 성장이란 반드시 위를 향해야 하는 법은 없는 것 같다. 옆으로의 성장도, 아래로의 성장도 다 성장인 것이지. 방향의 방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성장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이 신기함을 나홀로 볼 수가 없어서 나무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공유해줬더니, 아마 번개를 맞고 나서 위가 아니라 옆으로 자라난것 같다고 한다. 아, 살펴보니 중간에 뭔가 쪼개진  흔적이 있다. 번개에 맞고도 살아가는 나무라...나무가 부활했네? 그러고보니 나무가 양 팔 벌려 자라고, 그 나무 가지를 넘나들며 아이들이 놀이터처럼 놀고 있으니까 예수님의 형상을 닮았다.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지금도 긴 팔을 뻗어언제나 품어주시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주님의 품. 나도 언젠가 이 형상을 닮아갈 수 있을까.

예수님을 닮은 나무

신기한 나무를 지나고 장미꽃밭도 지나다가 공작새 무리를 발견. 수컷의 깃털 색이 정말 화려하다.

그리고 공작새 커플이 있었는데... 얘네들 내 앞에서 뽀뽀했다.

그래...너네라도 행복해라.
사랑이 넘치는 올로모우츠의 가을

신기하고 사랑스러운 풍경을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진다.

호텔 ;;

그런데, 너무 공원 깊숙히 들어오다보니 길을 잃어버린 거였다. 구글 지도에서 가르쳐준 출구로 나가봤는데 게이트가 잠겨있었다 ㅠㅠ 이대로 갇히는 걸까. 설상가상 자연이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푸른 자연 말고 내 속의 자연..) 그 때 한 체코인 커플이 산책하길래 다급하게 가서 출입구를 물어봤다. 그냥 냅다 비쇼드 비쇼드?(출입구) 했더니 웃으면서 앞장서는데 문제는 내가 되돌아왔던 그 길로 가는거다. 체코어를 모르니 그 길 아닌 것 같다는 말도 못하고 혹시 내가 모르는 출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용히 따라가는데 자기들도 잠긴걸 보더니 난처해하면서 다시 다른 출구로 방향을 돌려준다. 그렇게 한 20분은 또 공원을 누비고...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제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게 해주세요;;;)겨우 바깥으로 이어지는 출구를 찾아준 커플! 너무 고맙다고 인사를 했더니 웃으면서 천만에요~ 하고는 총총 그들의 길을 간다.

헤어지자마자 눈에 보이는 큰 건물에 들어갔는데 오, 감사하게도 그게 대학교 건물이어서 무료 화장실이 있었다!


날 구해준 체코 천사 커플


내 존엄성(?)을 지켜준 대학 건물

해방되고 나니 이제 배가 고프다. 구글 평점이 높은 식당에 찾아가서 신중하게 메뉴를 골랐다. 돼지 목살 스테이크와 구운 야채, 홈메이드 레모네이드.  너무 맛있고 연해서 정신없이 먹다가 왜 소스가없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소스를 따로 주문해야 하는데 (소스값 따로 받음) 내가 빼먹은 것 ㅋㅋ 그런데 간이 딱 맞아서 그냥 먹었다. 그 넓은 공원 산책을 강제로 2시간 가까이 하고 밥을 먹으니 맛이 없을수가 없겠지만 여긴 진짜 잘 한다. 내일 또 와야지.


강제 운동과 저녁 섭취를 마친 몸을  트램에 태우고 돌아와서 체크인을 했다.

길다란 복도마다 방 앞에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테이블, 스탠드가 있어서 진짜 좋다.

아늑한 나의 방. 침대 옆에 내 이름도 붙여줬다. (6명 기숙사방이라 이렇게 침대 표시를 해야 함) 객실 공간이 넓고 룸메이트도 3명밖에 없어서 널널하다.
오늘 밤은 정말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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