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으로 20살 설레는 마음을 안고 미국 LA로 몸을 싣었다. 한국에서 매일 영어를 읽고 말하고 쓰면서 약 6개월의 실력을 갈고닦아서 드디어 발휘할 기회가 왔다. CCUSA (Camp Counselor USA)라는 단체를 통해 캠프 카운슬러 (선생님)이 되고자 지원하고 합격해서 드디어 나에게도 미국으로 갈 기회가 찾아왔다.
지방 소도시에서 살았던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외국인 미국 아니야? 그렇다 외국과 미국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했고( 어렸고) 나에게 미국은 환상을 갖기에 충분한 나라였다. 그런데 내가 미국에서 미국 아이들을 가르치는 캠프 카운슬러 자격으로 가다니..! 다들 내 돈 주고 어학연수를 갔지만 나는 분명 내 돈을 들이지 않고 미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찾아보니 CCUSA라는 기회가 나에게 왔다.
북미에는 여름방학 기간마다 다양한 주제를 갖고 여름캠프를 연다. 그리고 캠프 연합회에서는 아이들을 위해서 국제 캠프 선생님들을 10% 정도 캠프지에 배정을 한다. 자원봉사도 아니고 당연히 일한 대가에 대해 돈을 제공한다. 잠을 자는 캠프 지역이기 때문에 잘 곳과 식사도 제공이 되고 주말에는 쉰다. 소위 짧은 시간 동안 해외 취업인 셈이다. 당시 한 달 1,000불이 넘는 돈이라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의 기본 시급이었던 것 같다) 국립대학을 다닌 나에게는 당시 한 학기 등록금과 맞먹는 돈이었다.
약 2달간 여름캠프 지역으로 파견되기 전에 LA에서 다 같이 모여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받기 위해 LA로 향했다. 다양한 곳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나는 비행기표를 샌프란시스코 - LA로 예약했다. 여전히 나에게 샌프란시스코는 나에게 설레는 도시이다. 혼자서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마치고 오리엔테이션 장소에 도착했다. 설렘과 긴장감이 가득한 분위기에서 미국 캠프에서 활용하면 좋을 간단한 게임과 노래를 배우고 행동수칙 등을 배웠다. 나 혼자 나름 영어 말하는 것을 한국에서 연습을 매일 했고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거라는 자신감을 안고 왔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첫날밤 난관이 닥쳐왔다. 저녁에 뭔가 맛있는 미국스러운 것을 먹고 싶은데 시내와 떨어져 있는 곳이라 전화로 주문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같은 방에 배정된 한국 친구가 쿡쿡 찌른다. 네가 전화해봐. 전화로 피자 주문이라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잘 못 주문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두려운 마음을 누르고 나를 등 떠민 친구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용감하게 전화기를 짚어 들었다. 나는 피자 이름과 사이즈 주소만 잘 말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주문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으나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끊고도 과연 피자가 제대로 올까 의심했다. 띵동, 다행히 피자가 왔다. 이렇게 나는 미국에서 전화로 피자 주문을 성공했다. 작은 성공이 모여서 자신감을 심어주는 짜릿한 경험이었다. 왠지 앞으로 2개월간 미국 캠프 카운슬러 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나를 선택한 여름 캠프지 미네소타로 갔다. 나를 공항에서 픽업하러 온 금발 단발머리에 젊어 보이는 여자분, 캠프 책임자가 반갑게 손을 흔드셨다. 어쩐지 안심이 된다. 나를 배려하기 위해 더 또박또박 천천히 말씀을 해주시는 것 같았다. 공항에서 캠프 지역까지 약 2시간 정도 차로 갔던 것 같다. 도심의 풍경을 지나서 숲 속으로 달렸다.
당시에는 스마트 폰도 없고 지도로 내가 어딘지 알아야 하는 시절이라, 내가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숲길이 었다. 또박또박 말씀해주시는 덕에 어느 정도 잘 알아듣는 것도 같고 뭔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느낌 (철저히 나만의 느낌)이었다. 숲 길을 운전하시면서 Look at that ' OOOOOO'! 반갑고 신나는 목소리로 밖을 보라고 하셨다.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래서 스펠을 읊어달라고 부탁했다. 주섬주섬 전자사전을 내서 스펠링을 하나하나 받아서 넣었다. 에스, 큐, 유.. 아니 다람쥐? 나도 Squirrel 쯤은 아는데.
내가 머리로 아는 다람쥐와 그 캠프 책임자가 하는 다람쥐의 발음은 달라도 너무 다르게 들렸다. 아 망했다. 이런 간단한 단어조차 알아듣지 못하다니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 해왔다. 내가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을까? 무식이 용감이라고 나는 내가 캠프지에 무슨 일을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채로 머나먼 땅 미국 미네소타주의 시골 바로 이 자리에 왔다.
그렇게 하나둘씩 캠프 카운슬러들이 모였다. 스코틀랜드에서 법을 공부하고 있는 레이첼, 호주에서 온 사라, 그리고 한국에서 온 나. 3명의 인터세녀널 캠프 카운슬러와 지역 근처에서 사는 미국 카운슬러 5명 그리고 보조 교사들이 모였다. 그렇다 매우 규모가 작은 걸스카우트 캠프였다. 그리고 모두가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만 모였다. 그렇게 나의 2달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미네소타주 안에 시도 아닌 카운티인 아주 작은 마을에서 나는 정말 눈이 띄는 외국인이었다. 캠프에 온 모든 아이들이 백인이었고, 유색인종은 나와 디트로이트에서 온 친구 1명이었다. 그 친구는 슬프게도 캠프 참여한 엄마들에게 대놓고 차별을 받았다. 그때 한번 더 인종차별의 현장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친구는 늘 겪어왔던 것처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늘 쾌활하고 활발한 모습을 유지했다. 이때 만났던 캠프 카운슬러들과 페이스북으로 인스타그램으로 연락하면서 지낼 정도로 2개월은 우리 모두에게도 아주 진한 경험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것 처음 보는 것 투성이었다. 참가하는 캠퍼들이 매일 재밌고 신나는 경험을 하도로 프로그램을 구성해야 하고, 매주마다 특별한 이벤트를 모여서 기획했다. 한 그룹의 인솔자로 매주 새로운 팀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캠프 디렉터는 나를 향해 한치의 의심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그랬다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자신감을 얻는다고.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부끄러운 영어실력이었는데 모두가 한 마음으로 나의 도전을 응원해줬다.
백과사전보다 두꺼운 캠프 매뉴얼 책, 입이 떡 벌어지는 크래프트 창고, 작은 호숫가에 놓인 몇십 개의 카누, 구명조끼 등 작은 캠프 지역에 부족한 물품이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거기에 여분으로 있는 몇십 개에 침낭이라니.. 걸스카웃의 상징인 펀드레이징을 위한 쿠키 창고 안에는 정말 내 키보다 높은 공간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천조국의 시골 캠프센터 풍경은 이러하구나.. 싶었다. 걸스카웃 캠프이니 당연히 야외 활동도 많았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모닥불 피기를 아이들에게 시전 하면서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새벽에는 북극곰 수영이라고 만 4살부터 아침 6시에 일어나 수영하는 프로그램 등 성인인 나에게도 굉장히 도전이 되는 프로그램들을 어린아이들이 즐기고 있었다.
캠프장에 가장 어린 친구 만4살짜리 친구가 왔다. 나는 너무도 작고 귀엽고 인형 같아서 이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수영을 마치고 옷 입는 것을 도와주고 짐도 들어줬다. 그런데 캠프 책임자가 나를 부르더니 스스로 할 수 있게 독려해주고 대신해주지 말라는 말을 하셨다. 머리를 한 대 맞는 듯한 충격이었다. 누가 봐도 너무도 어린아이인데 스스로 하게 하라니.. 지금 나는 캐나다에서 만 5살 쌍둥이를 키우고 있는데 북미의 교육방식은 스스로 책임지는 삶이었던 것이었다. 엄마가 된 나로 당연히 아이들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하게 독려하며 키우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어린아이들에게 독립심은 절로 키워지는 것이었다.
당시 노트북도 없으니 한국과 연락할 수 있는 길은 국제전화 밖에 ㅇ벗었다. 사실 매일 아이들과 새벽에 일어나 수영하고 야외에서 놀고 게임하다 보면 너무 피곤해서 밤에는 에너지가 안 남는다. 그래서 한두 번 정도 한국에 있는 가족과 통화한 게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한국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2개월을 보냈다.
아이들은 나에게 영어 선생님을 자청하면서 내가 잘 발음하지 못하는 Wood 나 이상하게 들리는 발음을 열심히 알려줬다. 한국에서는 평범한 사과 깎는 것 이라던지, 종이접기, 나에게는 평범하지만 이들에게는 신기한 것들로 나는 인기가 꽤나 좋았다. 그리고 한글로 아이들 이름을 써주니 아이들이 정말 신나 했다. 그때 나는 소통은 언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처음 다람쥐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생겼던 언어 소통의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매일 만나는 아이들, 주말마다 나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초대해주고 미국 문화 경험을 시켜준 동료들 덕에 언어의 두려움이 나를 잡아먹지 않을 수 있었다.
어느 주말 유일한 흑인 친구와 나는 둘이서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캠프장에서 닉네임을 서로 부르는데 본명은 케롤리나 캠프명은 Dramatic . 치어리더 출신으로 춤이며 노래며 흥이며 따라올자가 없었다. 늘 환한 이를 드러내면서 신나는 일에는 말 그대로 박장대소를 하면서 웃었다. Dramatic이 나에게 노래를 해달라고 했다. 나는 한국어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를 불러줬다 사실 영어로 아는 노래는 전부 캠프송이라 쉬는날까지 부를 수 는 없었다. 케롤리나는 가사를 이해하지 모르지만 내 노래를 듣더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캠프가 끝나고 각자 자리로 돌아갈 때 나에게 영어로 된 성경을 선물해줬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내가 캠프생활 속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문화랑 사고방식이 다르다고 내가 내 것만 고집하고 있었다면 나는 돈을 주고도 못할 귀한 경험을 백 프로 즐기지 못했을 것 같다.
캠프 기간을 마치고 스코틀랜드와 호주에서 온 친구와 셋이 시카고 여행을 갔다 그리고 자동차로 동부를 여행하는 프로그램까지 신청해서 여행을 다녔다. 그렇게 셋이서 나눈 이야기들 미래에 대한 생각 꿈 이야기는 잊을 수가 없다. 내 안에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 그 두려움이 나를 잡아먹지 않도록 하는 방식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2개월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와 나는 영어동아리 사람들에게 일취월장 나의 영어 실력을 칭찬받는다. 짧지만 매일 영어로 소통하고 영어로 이야기하니 나의 영어적 능력은 확장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이렇게 좋은 경험을 했으니 한국에 돌아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친동생 포함) 이 CCUSA 프로그램을 적극 추천했다. 나중에는 나에게 이야기 듣고 참여한 사람이 많아서 나에게 CCUSA 홍보대사를 해달라고 부탁까지 받을 정도였다. 내가 두려움 속에서도 이렇게 성공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사람에게 있었다. 캠퍼들이 좋아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좋아서 나를 배려해주는 이들이 좋아서 그렇게 진심을 담은 소통을 하다 보니 언어가 부족해도 서로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며 상황을 즐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