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라는 허상

내 삶의 컨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

by hym



크고 작은 위기의 순간, 지금의 궤도를 수정하지 않으면 뻔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물론 그 앎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인 세상사가 대개 그러하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의지와 무관하게 예기치 못한 폭풍우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니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너무 확대하여 지금의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피할 수 없는 폭풍우라면, 오히려 그것을 담대하게 마주할 용기를 기르는 것이 지혜로운 대처가 아닐까.


그런데 똑같은 폭풍우 앞에서도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이는 결국 각자가 살아온 배경, 즉 '컨텍스트(Context)'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반응이 '텍스트'라면, 그 텍스트가 나타나기까지 작용한 모든 배경은 '컨텍스트'가 된다. 텍스트가 빙산의 일각이라면 컨텍스트는 수면 아래의 거대한 몸체다. 같은 말이라도 컨텍스트가 달라지면 그 의미는 완전히 변한다. 그러니 드러난 텍스트만으로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작은 파도에도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이들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들의 컨텍스트를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비로소 그 흔들림을 수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타인의 컨텍스트를 세밀히 읽어내는 일은 몹시 녹록지 않다. 먼 타인은커녕 가족이나 지인을 이해하려 할 때도 그들이 살아온 배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타인의 컨텍스트를 읽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시급한 것은 내 안의 컨텍스트를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감정이나 생각에 휩싸여 타인은 물론 자신과도 불화하곤 한다. 화를 내고 나면 상대도 기분이 나쁘고 상처받지만, 화를 낸 자신 역시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부정적인 생각은 걱정, 불안, 두려움, 자괴감 등으로 이어져 자신을 파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내게 일어나는 화나 부정적인 생각의 '방아쇠'가 무엇인지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화나 부정적 생각은 누가 내게 던진 것이 아니다. 나의 컨텍스트를 바탕으로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무의식에 똬리를 틀고 있던 과거의 경험들이 자극받았을 때 방아쇠가 되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풍선 같은 것이다. 커다란 비눗방울을 톡 건드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이 과정을 '풍선(비눗방울) 터트리기' 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의 감정도 사실 비슷하다. 그 감정의 근원이 나임을 인식하는 순간 힘을 잃는다. 내가 만들어낸 감정이니 내가 충분히 없앨 수 있다는 건 이치에도 맞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만들어낸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경우가 허다한 세상이다. 걱정 없는 세상은 없다. 그 걱정을 있는 그대로 안아주고 함께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걱정 때문에 현재를 파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아닌가. ‘걱정한다고 걱정이 없으면 걱정 없겠네’라는 격언은 내 삶에 큰 힘이 되었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에 휘둘리는 마음으로는 작은 파도에도 휩쓸리게 마련이다. 크고 작은 파도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때로는 거친 파도마저 잘 타며 즐길 수도 있어야 마음의 근력이 키워지는 법이다. 모든 상황은 성장의 기회이기에, 잠시 아프더라도 바로 고통을 축제로 승화시키며 더 깊게 익어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한겨울의 추위도 따듯한 품으로 감싸안고 잘 다독이며 살아가 보자. 한바탕 꿈인 인생인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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