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없는 도시

편리함의 함정

by hym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봄처럼 포근하다가도 어느 순간 기온은 곤두박질친다. 추위를 피해 머무를 따스한 공간이 있다는 것이 새삼 고마운 저녁, 종일 집 안에만 머물다 산책을 나섰다. 두툼한 겨울 외투를 챙겨 입고 탑동까지 걸어가는 길. 한때 제주의 가장 번화했던 이곳은 신도시가 들어서며 활기를 잃었다. 꺼진 간판들이 즐비한 거리는 이제 적막에 익숙해 보인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도시를. 거대한 아파트를 해체해 제주 섬 전체에 낮은 높이로 쫘악 흩뿌리는 장면을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섬 어디에서든 한라산의 능선을 마주하고, 바다의 몸짓과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되면 밀집된 콘크리트 상자 안에 살면서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지금의 풍경보다, 훨씬 인간다운 삶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평평한 대지 위에 마당이 있고, 초가집의 구조를 닮되 현대적인 편리함을 갖춘 집. 각자의 울타리 안에서 사적인 삶은 존중받으면서도, 낮은 담벼락 너머로 이웃과 자연스럽게 눈을 맞추는 생활. 상권은 멀어지고 일상은 지금보다 조금 불편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속함’과 ‘편리함’이 늘 우리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만 이끌어 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편리함으로 아낀 시간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의미 있게 사용하고 있는가.


서울에서의 삶을 떠올려 본다. 출퇴근에 두 시간을 쓰는 일이 드물지 않았던 곳. 사람들은 시간을 팽팽하게 늘리며 분주하게 일상을 꾸려갔다. 물론 바쁜 삶이 반드시 더 좋은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너무 쉽게 주어진 편리함은 느슨해진 시간 속에서 우리를 안이하게 만들고, 작은 기다림조차 견디지 못하는 조급함을 키우기도 한다.


제주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차로 한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섬이다. 나는 우리에게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개성이 담긴 공간을 꾸미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꺼이 이동의 수고를 감내하는 '준비된 간격' 말이다. 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펼쳐지는 그 넓은 허허벌판을 두고, 굳이 제주에 고층 아파트가 솟아올라야 할 이유는 없다.


제주 시내의 버스 정거장 간격은 걸어서 오 분에서 십 분 남짓이다. 그 정도의 거리는 충분히 걸을 만한 가치가 있다. 땅을 밟고 걷는 동안 몸 건강은 물론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치유의 시간도 덤으로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에 비해 편리함이 급격히 증가한 요즘 들어, 편리함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너무 많은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낮은 담장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조금은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진짜 제주'를 닮은 삶을 다시 한번 상상해 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높은 층수가 아니라, 땅과 맞닿은 낮은 발걸음일지도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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