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의 빛과 그림자

그리운 자궁 속의 질서

by hym

우주의 질서일까. 하루 24시간은 어김없이 되돌아온다. 반복이라는 질서가 있기에 세상은 유유히 흐르고,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하루를 다시 쌓아 올린다. 나 역시 하루의 루틴을 만들며 마음의 안온함을 확보한다. 어쩌면 인간은 모두, 자궁 속의 질서를 오래도록 그리워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세상은 수많은 작은 질서들이 모여 거대한 흐름을 이룬다.


엄마의 자궁은 아기에게 완벽한 질서의 공간이다. 그 안에서 아기는 눈부신 속도로 자라나, 열 달 만에 하나의 세계가 된다. 생존을 알리는 울음을 터뜨리며 혼돈의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다시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어간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처럼, 어린 시절 형성된 질서는 평생 마음속을 흐르는 보이지 않는 강과 같다.

하지만 그 질서가 흔들릴 때, 마음은 곧장 불안으로 출렁인다. 혼돈을 견디기 어려운 인간은 질서를 유지하려 애쓰고, 그 결과 ‘강박’이라는 이름의 방어기제를 만들어 낸다. 강박은 정신이 빚어낸 질서의 과잉이다. 그 속에는 안온함에 대한 갈망과 파괴에 대한 공포가 공존한다. 갈망은 성실함과 책임감이라는 미덕을 낳지만, 공포는 불안과 집착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강박을 지닌다. 나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있지 않으면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내 평소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는 이들을 떠올리며 그들에 대한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가족들에게 “제자리에!”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남편은 “그 에너지로 그냥 조용히 갖다 놓으면 좋을 텐데”라는 표정으로 응수한다. 어떤 이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흐트러짐이 나에게는 삶의 균형이 깨진 신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스스로 루틴을 만들고, 설령 그것을 어겨도 큰 불편함이 없다면 그것은 '습관'이다. 화가 나더라도 그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면 건강한 질서다. 그러나 그 행동을 멈추었을 때 내가 무너질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온다면, 그것은 '강박'에 가깝다. 습관이 자기를 돌보는 질서라면, 강박은 자신을 구속하는 질서다. 물론 둘 사이에 칼로 벤 듯한 경계는 없다. 습관과 강박은 하나의 연속선 위에서 서로를 비출 뿐이다.


때로 우리는 자신을 단단히 세우기 위해 약간의 강박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 강박이 자율성을 침범하고 자신을 갉아먹기 시작할 때, 그것은 질서가 아니라 속박이 된다. 강박의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러나 그 흔들림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안온한 보금자리를 만들어갈 동력을 얻는다.


빛일 때의 강박은 성실의 힘이 되고, 그림자가 드리울 때의 강박은 자율성을 회복하라는 신호가 된다. 강박의 두 얼굴을 인지하며 그와 친구가 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박하는 질서가 아닌, 스스로가 만들어 낸 온전한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제자리에 놓이지 않은 물건을 보며 잠시 숨을 고른다.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