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은 언제나 한 박자 먼저 온다

<완벽에서 살짝 모자란>을 보고

by hym


방금 본 영화인데 제목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을까? 그게 바로 ‘나’다. 발음도 어려운 외국 배우 이름을 줄줄 꿰며 영화보다 더 재미있게 이야기를 전하는 이들은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기억하지 못하면 어때? 보는 순간을 즐기면 된 거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 왔지만, 그 말 뒤에 숨어 나는 점점 더 많은 것을 흘려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랜만에, 어젯밤 본 영화를 붙잡아 보려 한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아 슬그머니 넷플릭스를 다시 켰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영화 제목은 <완벽에서 살짝 모자란>이다.


이혼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난다.

전화 목소리만으로 호감을 느끼던 그녀는, 막상 그를 마주한 순간 멈칫한다. 남자의 키가 그녀의 어깨에도 닿지 않을 만큼 작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짧은 당혹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둘은 함께 웃고, 두려움을 건너며, 서로에게 천천히 스며든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 이야기가 사랑의 크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견고한 ‘기준’ 속에 살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특히 오래 남는 장면이 있다.

스스로를 자유로운 사람이라 여겨온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다.

“정상적인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며 어머니에게 소리 지른다

“편견 덩어리야~~”


그 말이 낯설지 않아 더 불편했다. 나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머리로는 안다. 다름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 사람을 하나의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것. 그런데 판단은 늘 그보다 먼저 도착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거의 본능처럼. 그리고 나서야 뒤늦게 따라온다. ‘아, 내가 또 판단했구나.’


영화 속 어머니의 말이 불편했던 이유는, 그것이 나와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종종 타인을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돌아보면 이해는 늘 한 박자 늦게 도착했다. 그보다 먼저 지나가는 것은, 언제나 판단이었다. 그래서 나는 편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편견을 조금 늦게 알아차리는 사람일 뿐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유쾌하고 통쾌하게 끝난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타인의 기준에는 쉽게 의문을 품으면서, 내 안의 기준은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오늘은, 누군가를, 무언가를 판단하기 전에 내 안에서 먼저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를 조금 더 오래 붙잡아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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