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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 울게 하소서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이어령저 열림원출판 중에서

by 여행자

오늘만 울게 하소서

이어령

일년은 열두 달, 삼백육십오 일

철이 들며 배운 것인데

아무리 해도 날짜를 잘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님이 떠나신 지 오늘 한 해가 되었다는데

바로 어제 같고 혹은 먼 신화의 연대 같은

기억의 착시 속에서 갑자기 끊긴 생명의 합창

음표와 음표 사이의 긴 자리에 서서 기다립니다

미처 함께 부르지 못한 나머지 노래를 위하여


그래도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고 만납니다

목마른 날이면 새벽 옹달샘처럼 찾아오시고 요

피곤하여 앉으면 나무 그늘이 되어 함께 쉽니다

뙤약볕 8월의 대낮 속에도

동짓달 문풍지 우는 긴 밤에도

우리의 눈물 자국과 때로는 긴 탄식

그리고 기도의 시간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펴면 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길 건너편 분명 당신을 보고

급히 횡단로를 건너가보면

아, 단지 가로등 그림자일 뿐

당신은 아무 데도 계시지 않습니다


어디에나 있고 또 어디에도 없는 당신

님을 찾아 돌아다닌 한 해가 되었는데

우리는 얼마나 날이 갔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한마디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는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 믿습니다"라고 말하면

그 끊겼던 생명의 노래가 다시 울리고

눈물이 마른 샘에서 백합꽃이 피어나는 웃음을 듣습니다

님은 우리의 아침이고 우리의 생명의 약속인 줄 아오나

용서하소서

다만 오늘 하루만 당신을 생각하며 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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