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도로 가라앉는 선박 탈출기
"이거보고 보스가 구현해달래."
며칠 전에 선임(겸 사수)이 pdf 파일을 전달하며 말한다. 늘 그랬듯 마감기한은 알려주지 않는다.
구현 설계가 담긴 기획 파일을 열어본다. 역시 늘 그랬듯 사장이 만든 기획서에는 어떠한 설명도 없이 네모만 가득한 내용뿐이다. 넌 닥치고 내가 만든 네모 형태로 구현하라는 듯이. 폰트 사이즈조차 써있지않았다.
생각해보니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선임이 나를 커버를 쳐준 적이 있었나? 본인 일에만 집중하기만 하고 업무 공유를 제대로 해준 적이 있었나? 선임은 내게 전달할 파일을 보면서 이상이 없다고 생각했나? 나보다 힘이 더 있는 선임이 사장에게 파일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생각을 한번도 안 해본걸까? 본인은 내게 파일을 전달했으니 끝이라는 식이던데, 내가 그동안 업무적으로 이상하다는 부분을 정리해서 선임에게 업무 흐름, 일정 등에 이의를 제기해도 선임은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업무 일정? 나는 보스의 장단에 맞출 뿐이야. 나도 마감일정 몰라." 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나는 개발팀에 속해있지만 어느 팀에도 속해있지 않은 채 근무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선임이 보스에게 보여줘야하니 작업물을 달라고 한다. 전달해줬더니 다음 날 선임에게 "10분 뒤에 회의 있을거야. 너도 같이 가야해" 라는 말을 들었고, 회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장은 '기획 회의'를 시작하겠다고 말을 꺼내며 회의를 시작했다.
기획이요? 사장님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이 업계 말고도 어느 업계에서든 설계, 기획이 완성되어야 그 다음에 디자인을 하든, 구현을 하는게 보통 아니던가요? 내가 만든 그 모든 구현 작업물(레이아웃, 디자인 내가 다 했는데)들은 갑자기 물거품이 되었네요?
사장과 사내정치하는 사람들은 갑자기 경쟁사 사이트를 들어가더니 이 디자인 그대로 가지고 오자고 한다. 일부 이미지도 따오라고 한다. 그러더니 외주 디자이너를 쓰겠다고 한다.
나는 모르겠어. 이 사람들에게 불만, 이의제기 할 가치가 없어졌어. 내가 이 사람들의 장단을 왜 2년 가까이 맞춰줘야하지? 위장이 다시 아파온다.
이것말고도 다양한 비상식적인 일들이 이 회사에서는 보통 일인양 생겨났었는데, 장기간 월급 지연입금과 보험료 미납때문에 안그래도 다 나았던 공황장애가 다시 생겨서 죽을 것 같아서 어제 사장에게 그만둔다고 말했다. 면담을 할 때 내가 그동안 업무방식에 매우 불만이었다고 일부만 얘기했더니, 최근 일로 업무 소통이 안되었다는 것이 답답했다고 말한다. 업무 진행도가 이러하다는 걸 얘기 안 한 내 잘못은 맞지만(변명을 하자면, 며칠동안 매일 번아웃이 와서 퇴근시간이 한시간 넘게 지날 때까지 아무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모니터만 바라보고있어서 사장에게 업무 전달 할 생각도 안 났었다) 선임도 얽힌 일인데 그는 사장에게 어떤 것도 전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근데, 모든 일의 원흉은 사장이 아닌가?
또한 회사 재정적인 것으로 내 1인가구 생활이 매우 불안해져서 나 자신도 망가졌으니 일 못하겠다고 하니, 그는 표정변화 없이 그래? 나가. 라는 반응이다. 순간 정신이 들면서 여기를 진작 나갔어야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불쾌한 표정 안 드러내려고 애썼지 뭐.
사장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상태가 글쎄. 나랑 안 맞는 사람들인거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동, 대화를 일부만 알려줘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반응들. 어떤 사람들은 내게 "너 거기 다니면서 정신병 안 걸린게 용하다."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정도. 이미 나는 망가져있었는데 버티고 있었지만.
가라앉는 배에서 드디어 탈출한다. 조금만 더 버티자 아무리 경기가 평년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들 하지만 살길이 있기를 바라며. 1년 반만에 찾아온 자살충동과 공황발작은 참 낯설던데 정신차리고 살라는 무의식의 뜻으로 해석하며 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