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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에 비친 얼굴

유년시절 이웃사촌

by 파묵칼레

좌석버스를 타고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 차창 밖 도시 외곽의 논과 밭, 작은 도로가 스쳐 지나간다. 집집마다 담장 밑에 핀 꽃들도 눈에 들어온다.


뙤약볕 마당에서 아이들 서넛이 놀고 있다.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노는 모습이 정겹다. 강아지들도 풀어 놓은 걸 보니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를 떠올리게 한다.


마침 신작로에 아스팔트 포장하는 모습이 보인다. 인부들이 뜨거운 아스팔트를 퍼서 넣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수증기가 올라오는 뜨거운 바닥 표면을 탠덤 롤러가 왔다 갔다 하며 단단하게 다진다.


그 길옆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자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준이는 이웃사촌이다. 유년기를 함께한 나보다 한 살 어린 똑똑한 아이였다. 준이 아버지는 농사일과 어부 일을 했다.


우리는 밤늦게 제사 지내는 날을 좋아했다. 여지없이 12시만 되면 제사 지낸 밥과 여러 가지 음식을 갖고 온다.


준이는 엄마 뒤 졸졸 따라온다. 나는 꾸벅꾸벅 졸면서 기다렸다가 꼭 먹고 잤다.


우리는 좀 특별한 음식이 있으면 뭐든 나누어 먹었다.

학교에서 시험 보고 나면 준이의 가슴엔 ‘수’라고 새겨진 메달이 달려있었다. 평균 90점 이상이면 주는 우수상 메달이다.


자랑스러움에 러닝셔츠 위에도 달고 다니는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해가 넘어가면 마당에 앉아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가 수확해 온 열무, 파 등 각종 채소를 달빛에 비추어 가며 다듬어서 가사에 도움을 주는 부지런한 아이였다.


준이는 연탄불에 갓 구워 입이 딱 벌어진 대합이나 노릇노릇 구워진 가재를 종종 나에게 가져다주는 심성이 고운 아이였다.


준이네 덕에 우리 집은 채소와 어패류를 사 먹는 일이 별로 없었다.


나는 준이 아버지 덕분에 바다에 가서 고동도 잡고 조개도 캤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꽃게를 거두는 일도 해봤다.


우리는 배꼽 산 능선 자락을 따라 솟아오르는 햇살을 받으며 달콤한 아카시아 꽃잎도 따먹으면서 오르락내리락 뛰어다녔다.


갯벌에서 반짝이는 윤슬을 품에 안고 개흙 놀이를 하였고 뒷동산 무덤 위를 신나게 뛰어다녔다. 준이는 늘 나와 함께 했다.


댑싸리 빗자루 하나씩 들고 벌판으로 나가 잠자리를 잡았다. 고추잠자리는 시시해서 잡지 않았다. 말잠자리는 물론이고 연한 녹색을 띤 왕잠자리라도 잡으면 신나서 함성을 지르곤 했다.


방아깨비도 잡고 메뚜기도 잡아서 강아지풀에 끼웠다.


까마중을 따 먹어서 입들은 보랏빛으로 물든 채 클로버 꽃을 엮어서 목걸이도 만들고 팔찌에 반지까지 만들어 끼었다.


지금은 좁아 보이는 마당도 그 시절 우리에겐 대단한 놀이터였다.


구슬치기, 팔방 놀이, 깡통 차기, 자전거 타기, 자치기, 댕구 치기 등. 준이는 매사에 승리욕이 강하고 놀이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하지만 가끔 그 열정이 식어 기분이 좋지 않으면 우리 집과 자기네 집 마당 가운데를 연탄재로 금을 긋고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였다. 나를 꼼짝없이 갇히게 한다.


내 자전거를 타고 마당을 서너 바퀴 돌게 해주면 곧바로 연탄재 금을 지워 버린다. 돌이켜 보면 자전거가 타고 싶을 때마다 그랬던 것 같다.

울퉁불퉁한 시골 버스 길이 신작로로 개선이 되면서 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길고 넓게 다듬어진 도로를 느닷없이 달리고 자동차가 뜨막하게 다니는 저녁이면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별다른 아유가 없어도 그저 달리기만 해도 즐겁고 흥겨웠다.


그러던 어느 날,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에서 잡기 놀이를 하다가 무릎을 심하게 다쳤다.


작은 돌멩이가 많은 신작로는 넘어지면 최악이다. 깨지고 긁힌 상처에 잔 돌멩이가 박히고 피가 주르륵 흘렀다.


우리는 무르팍이 깨진 상태로 집으로 갔다. 그 시절 최고 처방은 빨간약이라고 부르는 아까징끼를 바르는 것이었다.


나는 목욕 하고 상처 부위에 발랐다. 밤에 잘 때 욱신거리고 아팠다.


아침에 일어나니 꾸둑꾸둑해지고 옅은 막도 생겼다.


준이는 상처를 물로만 닦은 모양이었다. 상처에서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일주일쯤 지나니 내 무릎에는 딱지가 앉았다. 하지만 준이의 상처에서는 여전히 진물이 흘렀다. 덧나서 노란 고름도 나왔다. 아무렇지 않은 듯 다니는 그 애가 신기하기조차 했다.


왜 ‘약을 안 바를까?’라고 생각만 했다. 이제사 깨달았다. 준이 집에는 약조차 없었다. 무릎 상처의 아픔은 준이 삶의 일부분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준이네만 초가에 살았다. 준이 부모는 무르팍 곪은 정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당시 보통 가정의 비상약은 아까징끼와 원기소, 반창고, 가아제 정도가 전부였는데.


약 한 번 발라주지 못한 것이 유독 내 마음에 걸렸다.


사춘기를 지나 서로 다른 곳으로 이사 하며 소식이 끊어졌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도 신작로를 지날 때면 그 얼굴이 길 위에 어슴푸레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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