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계절의 사이에
계절이 이동하고 있다. 짧아진 해의 시간이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고 알려주는 것만 같다. 초저녁의 시간이 길어졌다는 뜻은, 반대로 밖에서 걸을 수 있다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도시의 열기가 식어가는 지금을 더욱 좋아하는 이유.
치열했던 지난 여름을 거슬러 봄으로, 그리고 모든 것이 차갑게 느껴지던 그 계절에 가본다. 자주 가는 카페 2층엔 역시 자리가 없다. 주말 오후에 가면 꼭 없을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올라가 보는 걸 멈추지 못한다. 카운터가 있는 1층,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테이블에 앉아있다. 그 프랜차이즈 카페 1층엔 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녀 등뒤가 어수선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 가로등 불빛이 켜지기 시작할 저녁 무렵, 정확히 무엇을 하러 갔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노트북 화면을 열고 앉아있었고 대뜸 생각했다. 그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들을 소유하고 싶어.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그 후 어느새 열 번의 달이 흘렀다. 그래서 내게 여기에 글을 쓰던 시간이 어떠했냐 묻는다면 시간의 주인이 되는 방법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경험은 시간 속에서 구조화되고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그 가치는 꽤나 쉽게 망각되기도 한다. 그 흩어진 시간의 빈틈으로 세상의 속도는 꾸물 꾸물 들어와 망설이거나 답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를 다그친다. 깊은 생각 따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며 일차원적인 관점만 부축이면서 좀 늦었지 않냐고. 그렇게 쏟아지는 시끌벅적함에 멀미를 하다가 으슬으슬 서늘한 바람이 새어 들어오던 창가 쪽 테이블에서 대뜸 들었던 생각을 곧바로 행동에 옮겨본다. 시간과 경험의 구체적인 질감을 제대로 챙기겠다고 다짐하면서.
해야 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잔잔한 흐름'의 요묘한 느낌이 있다. 어쩌면 애쓰면서 버틴다는 것의 다른 의미는 결과에만 집착하게 되는 단일적인 구조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스스로의 자연스러운 감각에 따라 움직이게 될 땐, 실험의 무대가 되어 세상의 시간을 한층 다채롭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 악물고 꾸역 꾸역 버티는 것과 자연스러운 파도를 타는건 동시대를 살아가도 다른 시간을 사는 것과 같다.
'파도에 몸을 맡기듯 흘러가는 대로'의 의미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관점과 감각으로 삶을 대하라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그럼 내가 믿고 따를 수 있는 그 감각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나는 것이냐 하고 물으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직접 경험한 시간의 느낌이 어떤 것인지 끊임없이 알고 싶어 할 때, 그때서야 희미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파도에 몸을 맡기듯 흘러가는 대로'는 시간에 대한 주인의식에서부터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누구나 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방법은 글을 써두는 것.
사실은 꽤 많은 일들이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이며 그 문제의 값은 계속하느냐, 계속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그래서 차갑고 따뜻한 겨울을 지나 봄, 그리고 다시 치열했던 여름까지 열 번의 달력이 넘겨진 그동안 나는 글을 쓰는 것을 선택했다. 정해진 요일, 일주일에 두 번. 하루에 1%씩만 더 내 시간의 주인이 되자며 네모난 노트북 화면이 보기 싫어진 날에도 타자기를 두드렸다. 내 글의 첫번째 독자는 언제나 나 자신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혹시 어딘가에 가닿는다면 어느 방면으로든 좋은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양질의 시간으로 이루어진 습관이나 관성을 어떻게 수치로 환산할 수 있을까?
긍정적인 도피처였던 곳에 투자한 시간이 복리처럼 쌓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