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책의 콤비네이션

무라카미 하루키 & 야마구치 슈와 구스노키 켄

by 혜아

한 번에 두 개의 책을 함께 읽는 것을 좋아한다.

보통은 자기 전에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데 읽는 속도가 그렇게 빠른 것 같진 않아서 한 권도 며칠에 걸쳐서 읽는 편이다. 이때 완전히 다른 분야의 책을 중첩해서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예를 들면,


경영 서적과 에세이, 철학과 소설 이런 식이다. 대개는 경영 분야가 이성적인 감각을 건드린다면 소설이나 에세이는 직관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느낌이다. 물론 책에 따라 두 감각 모두에게 영감을 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다른 분야의 책을 같이 읽으면 이렇게 두 감각이 말랑말랑해져서 함께 어우러지는 느낌을 좋아한다. 물론 하나의 책을 집중해서 끝내고, 또 하나의 책에 푹 빠져들고, 이런 방식을 선호하는 분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좋고, 이건 이거대로 좋은 것 같다.


그래서 요즘 함께 읽고 있는 책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저) 양윤옥 옮김

<일을 잘한다는 것>
야마구치 슈, 구스노키 켄(저) 김윤경 옮김


이렇게 두 가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고, <일을 잘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을 '일을 잘한다'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들이 일에서 탁월한 성과를 발휘하는지에 대해 경쟁전략 전문가인 구스노키 켄과 경영 전략 컨설턴트 야마구치 슈의 대담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이다.



이렇게 책을 동시에 읽다 보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완전히 다른 분야의 책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도 비슷한 메시지를 느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하루키의 책에서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나쓰메 소세키의 문체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문체도 이제는 고전이 되고 또한 레퍼런스로서의 기능을 합니다. 나쓰메 소세키나 헤밍웨이도 동시대 사람들에게서 종종 문체에 대한 비판을 받고 때로는 야유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스타일에 강한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그 당시에는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문체는 하나의 스탠더드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만들어낸 문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일본 소설이나 미국 소설의 문체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것이 되었겠지요.


비틀스, 비치보이스, 스트라빈스키, 말러의 음악, 고흐나 피카소의 그림, 헤밍웨이의 문체.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던 작품들이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훌륭한 오리지널이 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결국 오리지널리티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힘은 지속력과 자기 혁신력(자신의 스타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버전 업-책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이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분야든 외부에 의해 '어딘가 잘못된 것'으로 끝나버리면 그건 그 사람의 오리지널리티를 나타낼 수 있는 한 가지의 조건이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키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내게 맞는 스케줄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싶다. 그것이 작가인 내가 가져야 할 최저한의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글을 쓰는 게 즐거웠고 나 자신이 자유롭다는 내추럴한 감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표현 작업의 근간에는 늘 풍성하고 자발적인 기쁨이 있어야만 합니다. 오리지널리티는 바로 그러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을, 제약 없는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생생한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충동이 몰고 온 결과적인 형체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 때, 어떤 분야든 그 사람만의 오리지널리티가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은 스스로 그 일에 깊게 몰두하는 과정 안에서 자연스러운 기쁨과 즐거움이 느껴져야 한다.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그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지구력.

'오리지널'의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이 '시간의 경과' 이기 때문이다.


한편, <일을 잘한다는 것>에서는 '교양'의 조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두 권의 책을 함께 읽으면서 같은 메시지를 전달받았다고 느낀 부분이다.


요즘 시대는 필요 이상으로 정확성을 요구합니다. (중략) 이런 분위기에서는 자신이 스스로 확립한 가치 기준이 없는 사람, 쉽게 말해 교양이 없는 사람은 여러 상황에서 외재적인 정확성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됩니다. 의사소통을 할 때도 자신의 가치 기준보다 기존의 가치, 세상의 가치 기준에 맞추려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에게 불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이런 상황이 '교양의 상실' 혹은 '교양의 포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중략) 그런데도 사람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적 법칙에서 정답을 찾으려 합니다.


이 책은 사실 3년 전에 읽고 다시 집어든 책인데 처음 읽었을 때도 같은 부분에 밑줄을 쳐놓았다.

그때도 자신의 가치 기준에 대한 것이 관심사였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신의 기준'이라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음악이나 영화, 책에 대한 취향, 주말은 어떻게 보내는지, 일상적인 생활 방식, 여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지와 같은 것들도 포함되지 않을까.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아마도 높은 확률로 편협한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스템 밖에서 스스로의 가치 기준을 세우고 나아가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왜 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거야라던가, 저건 좀 잘못된 거 아냐? 와 같은 것들. 삶의 방식에 한 가지의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자신의 가치 기준'을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가진 고유의 기질이나 취향, 가치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이 있지 않을까.


두 책을 함께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오리지널리티를 만들 수 있는 시작은 '자신만의 가치 기준'을 확립하는 것. 외부의 정확성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고유성을 정립하는 것, 그건 아마 순수한 즐거움과 기쁨이 느껴지는 곳에서 나올 것이다.


자신만의 스타일이라는 게 비틀스나 피카소처럼 위대한 아티스트만이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권위에 주눅 들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고 기쁘게 하자!라고 생각하는 요즘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