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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단 Apr 19. 2022

이곳에서 언어는 의미를 잃는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전展


물체를 배경과 분명히 구분 짓는 까만 윤곽선, 이와 대비되는 원색의 강렬한 색감. 단숨에 ‘팝아트’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아리송한 지점을 보았다. 통조림 뚜껑, 마릴린 먼로처럼 아주 유명한 연예인의 얼굴, 코카콜라 병. 우리가 알 수밖에 없는 익숙한 사물을 가져왔던 팝아트는 친밀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예술’이라 부르니, 고상하고 기품 있는 사치품이 누구에게나 열린 일상으로 다가왔다. 그렇기에 대중이 열광했던 것이고.


그런데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의 작품은 낯설기만 했다. 사물의 형태는 아이폰인데 누군가 셀로판지를 갖다 댄 것 같은 연두색이라니. 특히 내가 쓰는 아이폰과 같은 모양새라서 혼란스러웠다. 하루에도 수백 번은 본 물체가 이토록 이질적일 수 있는가. 배경에 깔린 보라색도 낯섦을 더하면 더했지 어우러지는 느낌이 아니었다.



이것은 아이폰이 맞을까? 맞다면, 아이폰은 무엇인가?

이러한 형태를
갖춘 사물은 모두 아이폰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명칭은 의미를 충분히 담았는가?



처음 단어를 창시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답일까. 적어도 이 전시장 내에서는 아니다. 국어사전에 기록된 이름과 뜻은 모두 사라지고, 물체만 남는다. 물체에 이름을 붙이는 건 관람하는 개개인이다. 누군가는 ‘외계 생물체’라고 부를 수도, 다른 누군가는 입맛 없게 만드는 색 조합이라며 ‘다이어트’라고 일컬을 수도 있다. 각자의 경험과 생각에 맞추어 작품이 변한다. 관람객이 작품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주객전도를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은 개념미술이라고 부른다. 대중에게 쉽고 친근한 이미지를 건네는 것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이미 정해져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사물을 새롭게 관찰할 수 있도록 말이다.



큼지막한 캔버스의 크기와 위치도 낯설게 보기에 한몫한다. 핸드폰은 원래 한 손에 들어오는 물체가 아니던가. 그런데 전시장 벽면, 그것도 눈높이보다 높은 곳에 걸렸다. 멀다. 물리적 거리에서 무언가가 어긋났다는 느낌이 생긴다. 이렇게 캔버스 안팎의 생경함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다 보면 자연스레 질문이 이어진다.


이걸 뭐라고 부를까?


작가도 답을 주지 않는다. 괄호 안은 우리가 아는 사물의 이름이 있으나 이는 일종의 사실 확인이다.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 아이폰이다. 그렇지만 작품의 이름은 아이폰이 아니다. Untitled. 타이틀은 모두에게 다를 것이므로.


이와 관련한 작품이 하나 떠오른다. 작가의 초기작인 ‘참나무(An Oak Tree)’이다. Untitled로 도배된 전시장에서 흔치 않은 구체적 명칭이다. 하지만 이곳은 개념미술이 펼쳐지는 세상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아는 참나무는 굵다란 줄기에 가지가 사방에 자라나고 잎이 풍성한 초록의 모습일 테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한다. 이곳은 개념들이 떠다니는 공간임을.


작품이 전시된 벽을 따라가면, 유리 선반 위에 물 잔을 볼 것이다. 이게 참나무다. 도저히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저 선반을 참나무로 만들었나? 아니면 뭐, 나무는 물을 주어야 하니까? 당신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그런 셈이다. 다만 작품은 선반과 물 잔 모두를 통틀어 참나무라고 일컫었음을 기억하자.


더불어 양쪽 벽에는 물음과 답, 그러니까 참나무에 관한 대화가 담겼다. 이것이 참나무가 맞는지, 어떻게 참나무일 수 있는지 누군가 물으면 작가를 표방한 답변자가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다. 이를 친절함의 일환이라고 보아야 할진 모르겠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혼란스러울 대화이니까.


대화문을 천천히 읽다 보면, ‘어떠한 구성요소를 지녀야 비로소 이것이 된다’는 고정관념에 금이 간다. 혼란스러움이 이해를 낳은 셈이다.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물질의 원리원칙을 완전히 무시해야만 수긍할 수 있으니까. 


그림에 숨겨놓은 상징이나 이야기 따위는 없다.
내 작품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아쇠! 각자의 스토리를 만들라!


작가의 말에서 느껴지듯 미술이 어렵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도 고정관념을 깨기 좋은 전시였다. 어렵지 않아도 충분히 생각할 거리가 많다는 경험을 많이 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아트인사이트(https://www.artinsight.co.kr/)에서 초대권을 받아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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