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 (Love Letter)> 리뷰
그리고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SYNOPSIS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온 레이키치는 일본 여성들이 미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번역하는 일을 하며, 한편으로 잃어버린 옛 연인을 찾고 있다. 일본의 대배우 다나카 기누요의 연출 데뷔작으로,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여성의 시선으로 담고 있다.
감독
TANAKA Kinuyo(다나카 기누요)
출연
MORI Masayuki(모리 마사유키), KUGA Yoshiko(쿠가 요시코), MICHISAN Shigesan, UNO Jukichi(우노 쥬키치), KAGAWA Kyoko(카가와 쿄코), SEKI Chieko(세키 치에코)
1:1 정방형의 프레임을 영화관에서 본 건 오랜만이었다. 첫 장면은 일본어가 수 놓인 종이와 한 송이의 꽃. 컷을 바꾸어가며 글자와 꽃의 위치가 오묘하게 바뀌다가 꽃은 점점 그림자로 변해갔다. 꼭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것처럼. 컷이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내내 흐르던 서정적인 멜로디가 사라지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번듯한 차림새의 남자. 바삐 어딘가로 향하는 발걸음이 익숙해 보였다. 아주 잘 아는 길을 습관처럼 걷는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 도착지는 집이었다. 번역가로 일하는 자신의 형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곧장 그의 손에 일감을 쥐어준다. 방 안에서 번역 일만 하느냐는 가벼운 타박에 멋쩍게 웃는 남자, 레이키치는 이런 상황이 익숙해 보인다.
그에겐 작은 방이 생활 반경 전부일 것 같았는데 곧, 변화가 생겼다. 친구의 제안으로 이제는 논문 같은 서적이 아니라 편지글 번역을 맡는다. 어디에서 어디로 부쳐지는 편지인가 하면, 미군과 사귀는 여성들의 재촉과 질타 따위를 영어로 보내는 일이다. 대개 양육비를 제때 내지 않는 등 벌인 일을 책임지지 않은 것에 화를 내는 편지였다.
여기서 주목할 건 질타의 방향이다. 1953년 영화인만큼 시기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국이 된 일본과 일본의 적국인 미국. 십 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니 오묘한 감정선을 타리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의연하다. 편지 번역을 의뢰한 여성의 한숨 섞인 말에도 레이키치는 헤실대는 웃음이 전부였다. 전후의 분위기가 담기지 않은 걸까, 혹은 일이기 때문에 감정의 분리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사람이 의연한 걸까.
약간의 의구심을 일으킨 채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바로 미치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치코의 목소리였다. 마유키는 곧장 밖으로 뛰쳐나가 미치코를 찾는다. 하지만 이미 그가 떠난 후였다. 온화한 미소와 점잖은 말씨, 그리고 묘하게 기품 있는 지적인 레이키치의 모습이 한 번 깨진 순간이다. 레이키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는 사람, 그것도 오래 기다려왔던 미치코라는 걸 알게 된다.
미치코는 이혼 후 혼자 지내고 있는데 레이키치는 자신의 첫사랑인 미치코를 잊지 못해서 주변의 재촉과 물음에도 시종일관 웃음으로 대응하며 그를 기다려 온 것이다. 지극한 순애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이 모든 건 레이키치의 생각이자 바람이고, 자신이 타인에게 관철시키고 싶은 뜻일 뿐. 다만 지식인처럼 보이는 번듯한 겉모습에 그의 요상스러운 집착은 그럴싸하게 포장된다.
두 사람은 결국 조우하고, 서로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면서 레이키치의 오랜 꿈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레이키치는 그렇게 그리던 미치코를 단 한 번에 내팽개친다. 미군에게 편지를 보내려는 의뢰인으로 미치코가 나타난 것이다. 레이키치가 상대했던 여성 의뢰인들은 대개 미군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던 여성이었으므로 그가 꿈에 바라던 '순결한' 미치코는 영영 사라진 것이다.
레이키치 마음 한 편에 있던 아이러니가 그제야 가시화된다. 미군에게 보내는 편지는 사실 책망과 불안이 뒤섞인 내용이어야 한다. 양육비는 결국 생활에 필요한 최소 비용의 일부이자 무엇보다 미군이 벌인 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므로. 회유나 설득으로 점철되어야 할 언어는 레이키치의 손을 거쳐 로맨틱한 것, 그러니까 '연애편지'로 왜곡된다.
그 여성들이 바라는 건 다정한 말을 속삭이는 연애가 아니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경고이지. 그러나 와 편레이키치지의 수신인들에겐 상냥한 말씨로 다정히 말하는 '여인' 쯤으로 다가올 뿐이다.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의 위계가 미군-일본 여성부터 일본 내 남성 지식인-하층 여성으로 확장되어, 영화에서는 개인의 모순으로 드러난다.
미치코는 자신은 그들과 다르며, 미군과는 진지한 만남을 가진 것이지 몸을 판 게 아니라고 그의 오해를 풀고자 한다. 영화는 그의 말이 변명인지 해명인지 파헤치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듯 미치코의 진위여부는 조명하지 않는다. 대신 레이키치의 동생을 내세워 한쪽에서는 설득과 거절을 반복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상황 설명과 이해를 표하려 한다.
끝으로 치닫은 영화는 다시금 우연을 활용한다. 미치코와 레이키치의 재회가 그랬던 것처럼. 미치코를 자신들과 동류라고 말하는 성매매 여성들을 만나고, 힘겹게 그들을 뿌리쳐 낸 미치코와 레이키치의 동생. 미치코는 자신의 억울함을 표명한다. 동생은 이에 동조를 표하고, 레이키치는 미치코와 대화를 하고자 그의 집에 찾아간다. 그를 '용서'할 가능성을 생각하며.
레이키치의 행태는 볼수록 아리송했다. 과연 이 남자가 느끼는 배신의 근원이 뭘까? 미치코가 '미군'과 얽혀있어서 그 자신의 애국심을 무한히 발휘한 것일까, 혹은 '순결함'을 잃었다는 생각에 분노를 느낀 것일까, 둘 다일까. 한 사람의 명확한 계기는 알 수 없으나, 분노의 감정이 치솟은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이, 그리고 사회가 규정한 올바르고 좋은 상태의 여성을 자신이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상정했고, 이를 타인에게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자신만의 판타지를 견고하게 만들었으며, 이를 현실로 소유하고자 했음을.
이러한 꽉 막힌 시선에서 벗어나는 건 어째서 또 다른 고통뿐인지. 또 '우연한' 교통사고로 미치코는 레이키치와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병원에 실려간다. 이윽고 전보를 받은 레이키치 또한 병원으로 향하는데, 차 안에서 그의 친구가 말했다.
일본인 모두 전쟁에 책임이 있어.
전쟁이 끝난 뒤 다들 힘들게 살고 있는데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어?
이야말로 영화 전체, 특히 레이키치를 꿰뚫은 말이다. 대체 누가 누구를, 무엇을 근거로 탓하는가? 레이키치 자신이 참전군인이라고 해서 자신의 기준대로 타인을 재단할 순 없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채 더 약해 보이는 존재에게 화풀이하는 꼴이다.
전쟁은 끝났는데 왜 홀로 전쟁 속에 갇혀있는가.
Schedule in SIWFF
2022-08-27 | 20:30 - 22:05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2022-08-30 | 13:30 - 15:05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서울국제영화제 SIWFF
8/25(THU) ~ 9/1(THU)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SIWFF 티켓을 받아 관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