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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단 Oct 04. 2022

우리는 우주 먼지에 불과하기에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대체  영화를 뭐라고 표현할까. '짬뽕' 너무 맛깔난 표현이고. 그럼 '팔레트'? 너무 감성적이고 섬세하다.


마땅한 단어를 떠올리던 무렵, 박찬욱 감독의 한 줄 평을 발견했다.


야단법석 왁자지껄 아수라장 대환장파티에서 막 빠져나왔는데 거울로 보니 내 눈에 눈물이.


그래, 이거다. 영화의 첫인상은 '정신없다'였고, 언젠가부터 '감독의 정체가 뭘까' 싶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땐 눈물 콧물 범벅된 마스크에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종류의 영화였으니까.


컷 전환이 쉼 없이 빠른데도 러닝 타임은 2시간을 훌쩍 넘으니 실제보다 더 길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니 기깔나는 상영관에서 보는 걸 추천한다. 또렷한 색상 구현과 입체적인 사운드를 선보이는 돌비 시네마라던가.


돌비에서 본 덕에 이런 감상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메가박스 코엑스. 영화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아래로 늘어진 계단 한쪽에 털썩 앉았다. 전광판은 때마침 <에에원>의 짤막한 예고편을 무한 반복 중이었다. 사전 정보 없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시선을 두지 않았는데, 소리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I'll save you"였나. 뭘 구하겠다는 말이 반복해서 들렸다.


뭐지. 세상을 구하는 전사 이야기인가. 히어로 영화인가. 저 사람이 주인공인가 보다. 대충 예감하며, 오래 앉아야 하는 걸 대비해 화장실에 들렸다. 그리고 아쿠아리움 같은 돌비 시네마 입구에 들어서서 공연장 같은 좌석에 앉았고. 돌비 시네마는 이 시스템이 얼마나 대단한지 온몸으로 체감하게 한다. 애피타이저로 입맛을 돋우듯 영화를 보기 전 오감을 일깨운다. 두근두근. 괜한 기대감에 사로잡히던 찰나,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땐 몰랐다. 화장실에서 휴지를 뜯어왔어야 했단 걸.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했습니다.

*아래로는 스포가 이어집니다.






거울.


그게 영화의 시작이었다. 컷 하나인데 길이가 꽤 길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들은 웃고 있었던가. 무언가 말하는 것도 같았다. 천천히 거울 속으로 들어가듯 카메라가 가까워지고, 거울 안 세계로 화면 가득 들어찼다. 거울을 마주한 나와 거울 속 나. 하나이지만 둘이고, 둘이지만 하나다. 지금 생각하면 '우린 멀티버스 세계관입니다'를 대놓고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관람 중에 멀티버스를 생각하지 못했던 건 이어지는 장면이 워낙 정신없어서다. 책상 위를 한가득 메운 하얀 영수증들. 다소 꾸깃꾸깃한 영수증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냈고, 그걸 정리하는 건지 신경질을 내는 건지 모를 동작으로 주인공 '에블린'이 자신의 남편과 뭐라 뭐라 대화를 이어갔다. 국수 좀 봐달라, 아버지 생신인데, 세금 내야하고, 조이가 여자 친구를, 영수증은 다, 세탁소가,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이 영어와 중국어를 마구 오가며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보는 이도 정신없는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더 정신이 없겠는가. 에블린은 남편 '웨이먼드'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말하지만, 정작 웨이먼드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못한다. 밝고 쾌활한 목소리로 날카롭고 까칠한 에블린의 비위를 맞추는 듯했다. 여기에 그들의 딸, '조이'가 여자 친구 '베키'를 데려온다. 조이도, 베키도 환영받지 못한다. 특히 에블린에게서.


정신없이 얽히던 흐름이 뚝, 끊기던 때가 있었으니. 에블린의 아버지가 집에서 세탁소로 내려온 걸 발견하고서였다. 중국어에 서툰 조이가 할아버지에게 베키를 설명한 단어를 찾고 있을 때, 에블린이 말을 빼앗는다. 조이의 친한 친구라고. 그런 식이었다. 에블린은 조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먹고사는 데 급급해서라지만, 명백한 거부 의사였다.


에블린, 조이, 웨이먼드, 이들 가족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 놓였다. 웨이먼드는 이혼 서류를 내밀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바쁜 상황에 내쳐졌고, 막상 목숨이 오가는 급급한 상황에 치닫고서야 에블린이 그 서류를 펼쳤다. 혼돈에 또 다른 혼돈인 거다.



세무사에게 세탁소 회계감사를 받는 게 무슨 목숨까지 걸 일이 되었을까? 바로 웨이먼드가 '알파' 세계의 웨이먼드로 바뀌는, 멀티버스 세계관이 열리고부터다. '조부 투파키'라는 거대 악이 세계를 뒤흔드는 중인데 에블린이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다는 거다. 당연히, 에블린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웨이먼드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왔던, 꿈과 사랑이 넘치던 20대였으면 모를까. 지금은 쳇바퀴 같은 삶에 허덕대기 바쁜 시궁창 인생인데.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런데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지금의 에블린이 택하지 않은 삶을 택한 에블린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거다. 능력 넘치는 버전의 에블린 말이다. 그렇다. 어딘가엔 웨이먼드를 따라가지 않고, 늦은 밤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가 쿵후 선생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고, 쿵후를 마스터해서 세계적인 액션 배우가 된, 돈/명예/커리어 어느 하나 놓치지 않은 에블린이 있다.


자, 이제 괴팍한 버전의 세무사 '디어드리'에게 맞설 쿵후 전문 배우 에블린이 필요하다.



이쯤 되어선 멀티버스의 개념과 스토리의 뼈대를 다 설명해서인가. 온갖 장르가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액션, 호러, 코미디, 시트콤, 블랙코미디, 공포, 드라마, 다큐멘터리, 스릴러, 로맨스, 애니메이션,... 장르의 멀티버스화라고나 할까.


멀티버스 세계관을 보여주느라 교차하는 장면이 많지만, 전체적인 톤앤매너는 비슷했다. 코미디. 다만 한없이 가볍고 허술한데 이상하게 매력적인 B급 영화인 것 같다가 진중하고 철학적인 상황으로 들어섰으니. 바로 돌들의 대화 장면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전체 분위기는 코미디인지라 갑작스러운 전환에 영화관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조부 투파키, 그러니까 조이의 멀티버스 중 한 모습이자 어찌 보면 본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가 평온을 느끼는 건 자신이 돌인 세계가 유일하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누구에게 명령을 내리지도, 싸우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때. 그러나 외로움은 느꼈는데, 자신처럼 모든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게 된 에블린과 함께라면 충분하다고.


딸의 말에 에블린이 동조했을까? 일상에 전전긍긍하던 에블린이라면 그랬을 거다. 이거야 말로 자신이 꿈꾸던 거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때의 에블린은 이전과 다르다. 특별한 능력치를 지닌 에블린과 연결하여 뭐든 될 수 있어서, 세상을 구할 히어로라서 그런 게 아니라, 용서했기 때문이다. 실패로 점철된 자기 자신을.


It was beautiful.


에블린이 웨이먼드를 택하지 않은 덕에 유명한 배우가 된 세상을 경험한 후, 현재로 돌아와 남편 웨이먼드에게 했던 말이다. 꿈꾸는 표정 때문에 웃음이 절로 났지만, 마냥 재밌게 넘길 장면은 아니었다.


수천 번 생각했을 거다. 웨이먼드 대신 다른 걸 택했다면 자신의 삶이 이토록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그는 매번 헤실대면서 긍정적으로만 굴지, 실속 없다고. 그 때문에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라고. 남 탓을 하는 건 신기하게도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모든 선택은 자신이 했기 때문이다.


실패하는 선택지만 쏙쏙 골라온 스스로가 얼마나 불쌍하고 멍청하게 느껴지겠는가. 비관의 늪에 빠지기 딱 적절한 상태로, 에블린은 살아왔다. 웨이먼드가 끝을 고한 것도 애정이 닳았다기보다는 괴로움 때문이었을 거다. 함께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는데, 자신은 에블린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았으니까. 각자도생이 최선이라고.


남편인 웨이먼드가 아니라 알파 웨이먼드를 더 의지하고 따르던 에블린을 생각하면 그럴 만하다. 싸움에 능하고, 자신에게 나아갈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고, 단호하게 말할 줄 아는 웨이먼드를 훨씬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배우의 삶을 사는 다른 에블린의 세상에 평생 머물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러나 에블린이 알파 행성에서 온 이들과 완전히 대치 상태에 놓였을 때, 에블린도 조부 투파키처럼 파괴의 기로에 서려고 할 때, 에블린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하다. 남편인 웨이먼드의 절박한 외침으로 말이다. 그가 말했다.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고. 그 이전인가 이후였나. 이 말도 덧붙였다. 자신의 바보 같은 친절함은 생존 전략이라고. 우린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고.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런데 왜 지속적으로 싸우는가. 시작은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런데 싸움이란 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목적이 흐릿해진다. 모르겠는 순간에 놓이는 거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그러나 솔직하게 이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 약점이 될 것만 같다. 싸움은 대개 분노를 연료로 쓴다. 분노란, 과시다. 자신의 타당성과 힘을 드러냄으로써 타인을 이겨먹으려는 생각이 다분하다. 모든 생명체는 위협을 느낄 때 이렇다. 검붉은 속 날개를 펼치는 곤충이나 독을 뿜는 전갈이나 뱀처럼.


그런데 그깟 따사로운 마음이라니.

분노는 강하지만, 따스함은 유약하다. 유약하기에 솔직하다. 아프기 싫고, 누군가를 아프게 하기도 싫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무섭고, 나만 그만하고 싶은 것 같아서 더 무섭다는 걸 대놓고 내보인다. 전쟁터 한복판에 누워서 두 손 두 발 다 든 상태.


'적'이라고 상정한 존재들은 무시무시해 보인다. 하지만 집단이 아닌 각 개인으로 보다 보면,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그들의 삶도 작고 사소한 불만과 불평, 욕망으로 그득하다. 타인에게 평가 받을까 봐 말 못할 비밀을 품고, 답 없는 문제를 안고, 앓고만 있는 거다. 에블린은 공격하는 대신 그들의 갈망을 들여다본다. 말 못 할 성적 취향이 있고, 신경 통증 때문에 고생 중이고, 자신의 단짝을 애절하게 찾는 각각의 사람.


솔직한 마음을 받아들이고 나니 그 누구도 공격할 여력이 없다. 발라당 바닥에 누워서 행복에 겨울뿐.


영화에서 줄곧 던진 메시지가 이랬다. 죽어라 싸우고 요란법석 피워봤자 한낱 우주 먼지인 인간들. 지구도 우주에 있는 크고 작은 행성들 중에 하나이다. 지구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면, 인간이 전부라는 생각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무수하디 무수한 존재 중에 하나인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Nothing Matters.


별 거 아니기에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삶을 내던지려던 인물, 혼돈 그 자체였던 조부 투파키였다.



그가 만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암흑, 블랙홀. 영화에서는 이걸 까만 토핑이 박힌 베이글로 유쾌하게 표현하긴 했다만. 조부 투파키는 세상을 휩쓸 생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단으로 베이글을 만들었다. 모든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마음껏 될 수 있기에 되레 아무것도 의미가 없던 거다.


가운데가 뻥 뚫린 베이글의 모양새가 그의 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겉은 사악함의 결정체 같아서 모두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다. 비어있는 걸 감추기 위해 겉모습을 더더욱 화려하고 시끌벅적하게 꾸며냈는지도 모른다.


다 갖춘 그에게 필요한 건, 정말이지 인간다운 결론이긴 한데, '의미'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해서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둘째 치고, 나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나는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데에 멀티버스 세계관만큼 적합한 게 있나. 에블린의 모든 선택이 무수히 많은 세상의 에블린을 만들었다. 각각의 에블린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환경, 취향, 욕망을 따라 새로운 일을 겪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길을, 새로운 삶을 만들어간다. 아무것도 아닌 그토록 작은 먼지 하나가 이리도 다양한 굴곡을 헤쳐나갔단 말이다.


그러니 살면서 문득, 혹은 지금 당장 자신이 의미 없게 느껴진다면 여태까지의 삶을 돌이켜보자. 셀 수도 없이 많은 선택들을 말이다.

정말, 나 자신이 나에게 아무 의미 없었나?



세무사 디어드리와 에블린은 알파 세계관에서도, 현재 세계관에서도 앙숙이다. 디어드리는 이미 에블린을 문제 투성이라고 여기고, 그런 무지막지한 모습을 에블린은 융통성 없다고 느낀다. 그런데 손이 핫도그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둘은 애틋하고 사랑이 넘치는 관계다. 이런 대비는 클리셰 같은 걸까? 잘 몰라서 멋대로 판단하는 것이지, 알고 보면 나쁜 사람도 착한 사람이라고. 서로 사랑하기 공익 캠페인 같은 휴머니즘일까.


영화의 끝자락. 정해진 기한(당일 오후 6시) 내에 영수증을 다시 정리하라는 디어드리의 마지막 경고는 당연히, 산전수전 다 겪은 에블린이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때 에블린은 방망이를 들고 주저 없이 나아가 유리창을 시원하게 깨부순다. 답이 없으니 완전히 미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블린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드러냈다. 세탁기와 건조기로 그득한 이 공간이 얼마나 지긋지긋할까. 다 엎고 싶었을 텐데 그걸 꾹 참고 누르고 견디기만을 반복했다. 모두가 곪아 터지면서까지. 무모하고도 무책임한 행동. 그거야말로 에블린에게 가장 필요했다. 한 번쯤은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갔어야 했다. 못해먹겠다고.


에블린이 자신의 생존전략을 썼듯 웨이먼드도 자신의 전략을 펼쳤다. 그리고 디어드리는 일주일로 기한을 늘린다. 정말 마지막이라며.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기에. 에블린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웨이먼드가 한 얘기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자신이 에블린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고. 디어드리도 에블린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자신도 그 느낌이 뭔지 안다고. 오묘한 동질감과 유대감이 생긴 둘.


마치 다른 핫도그 세계 속 에블린과 디어드리의 관계가 여기까지 이어진 느낌이었다. 에블린들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게 아닌 것 같다. 라쿤에게 요리를 배운 '라따뚜기' 요리사의 이야기로 알게 되었듯, 우리는 혼자가 아니니까. '나'만 해도 내가 무수히 많아서. 지금의 나는 실패만 해왔을지언정 그게 전부가 아닌 것이다.


이 엄청난 교훈과 깨달음을 싣고 영화는 마지막 장면으로 향한다. 예전처럼 세무조사를 받으러 온 상황.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함께 온 사람들과 그들 간의 관계, 디어드리와의 관계, 태도, 그 모든 것이. 이미지로 충분히 보여줄 수 있지만, 영화는 딱 한 마디로 전부를 보여준다.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체면 차리느라 속마음 숨기며 애먼 일 벌이지 말고, 솔직 담백하게. 평가받을까 봐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의 결핍 앞에서 당당히. 우스꽝스럽고, 멋지고, 재밌고, 지루하고, 진지하고, 덤벙대고, 약속을 잘 지키고, 늦고, 웃고, 우는 온갖 모습의 나 자신에게, BE KIND.


끝으로 왓챠피디아에도 남긴 감상을 이곳에 한 번 더 공유해본다.



Nothing matters. So please, be kind to EVERYTHING EVERYWHERE. Then you realize the whole world ALL AT ONCE.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닌 존재랍니다.
그러니 온갖 모습을 지닌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세요.  자신의 의미가 완전히 새롭게 보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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