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여전히 미쳐있는』
19세기 여성 문인들의 삶을 조명한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두 저자,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가 다시 뭉쳤다. 선연한 빨간색의 표지와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내용은 그들이 얼마나 '미친' 여성들을 말하고 싶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열기는 현대의 한국 여성 독자들에게까지 닿아 북펀드 목표 금액을 1200% 달성하며 19세기와 21세기를, 영국과 한국을 연결하던 초석이 되었다.
책 제목에서 보이듯 이번 책도 뜨거운 정신을 그대로 이어간다. 흰색이 주를 이룬 덧표지 속 선연한 빨간색을 포인트 칼라로 정해 말 그대로 '미친' 느낌을 자아낸 게 전작이라면, 이번엔 형광 연두의 덧표지와 검은색 하드 커버다. 시리즈물처럼 흐름을 이어가는 결과물은 내용을 열어보지 않아도 많은 것을 말해준다. 특이하고 이질적인 핫핑크와 형광색도 한데 섞은 후엔 검은색으로 통일된다. 용암처럼 타오르는 새빨강이 아니라 칠흑처럼 어둡고 고요하게.
다락방에 숨어서 펜을 들고 묵묵히 써내려 간 자들은 세상에 대한 분노에 휩쓸린다. 끊임없이 말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우리는 어딜 향해야 하는지. 19세기, 영국, 여성, 문인들. 성별을 제외하곤 별 수 없이 낯설던 주제가 이번엔 살짝 달라졌다. 아시아권까진 확장하지 못한 건 아쉽긴 해도 1950년부터 21세기까지를 아우른 덕에 좀 더 가까운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 가며, 때로는 책망하고 배제하고 편을 나누고, 그럼에도 서로의 존재에 알게 모르게 힘이 되는 이야기의 일부를 밑줄 그은 문장 위주로 열어보려 한다.
프롤로그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
1부 흔들리는 1950년대
1장 20세기 중반의 성별 분화
2장 인종, 반항, 반발
2부 폭발하는 1960년대
3장 분노에 찬 세 목소리
4장 성 혁명과 베트남전쟁
3부 깨어난 1970년대
5장 가부장제에 저항하다
6장 사변 시, 사변 소설
7장 자매들, 연결과 상처
4부 페미니즘을 다시 쓴 1980년대와 1990년대
8장 정체성 정치
9장 상아탑 벽장의 안과 밖
5부 후퇴와 부활의 21세기
10장 구세대와 신세대
11장 부활
에필로그 흰색 정장, 깨진 유리창
서막은 의문을 제기하며 열린다.
하지만 정말 문화가 변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우리와 우리의 많은 친구들은 여전히 미쳐 있을까? 격노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미쳤다는 것이다. 미친 듯 화가 나고 혼란스럽고 반발감이 치솟는다는 의미에서 미쳤다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영역에서 성공했다면 그 영역에서 백래시에 부딪칠 것이다. 당신이 유리 천장을 깨부수었다면 깨진 유리들을 밟고 가야 할 것이다. 당신이 한껏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비틀거리며 넘어질지도 모른다.
프롤로그, p.15
그들이 공동 집필한 첫 번째 책이 출간된 지 어느덧 40년. 거의 반세기가 지나는 와중에 무수한 변화를 맞닥뜨렸다. 원하던 방향으로의 전진은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이번엔 북미권 여성들을 대상으로 말하기에, 자연스럽게도 7년 전 대선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때는 2016년,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이어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까. 미국 대선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커다란 이벤트이지만 유난히 더 시끌벅적했다. 성, 인종, 종교, 장애 등 모든 범주에 차별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자극적인 행보로 기삿거리가 밀려 나왔으니까.
자국민 우선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세계의 중심이자 중재국가 아닌, 지배국이 되겠노라고 단언하던 모습. 이미 가진 것을 결코 뺏기지 않겠다는 선언. 그가 당선되었다는 건 결국 사람들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자신이 손에 쥔 것이 많다는 걸 분명히 알고, 이것들은 제 손에 있으므로 반드시 자신만의 것이며, 내 것을 남들과 나누겠다는 건 뺏기는 것과 다름없다고 억울해하는 속내를.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경고해 왔듯이 "권력이란 그것이 어떻게 발전해왔든 그 기원이 무엇이든 간에 투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포기되지 않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p.333
모든 힘은 착각을 낳는다. 그 힘이 언제고 자신의 것이라는 착각. '지금' 무언가를 가졌다는 건 그전부터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다. 누구도 이에 대해 문제나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기에 지속된 흐름이었고, 변화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이제 와서 갑자기 뺏어가겠다는 위협으로 간주할 뿐이다.
"우리는 호의를 베풀어달라고 부탁하는 수동적인 애원자의 모습으로 등장해서는 안 된다. 힘을 가진 측은 마찬가지로 힘을 가진 측하고만 협력하기 때문이다."
p.182
사실 투쟁 없이 얻은 게 어딨겠는가. 무언가를 소유하기까지의 과정은 소유한 순간부터 무의미해진다. '이미' 누군가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 혹은 집단에게 귀속된 것을 스스럼없이 놓아줄 이는 없다. 자발적으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이상. 결국 권리를 주창하는 일들은 반드시 맞닥뜨려야 한다. 지난하고 어려운 싸움을.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성운동을 주장하는 이들 중 다른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관심 또한 깊은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늘 궁금했다. 유독 페미니즘과 다른 권리들이 함께 결부되는 이유는 무엇일지. 어쩌면 책에서 짚은 대목이 하나의 힌트인지도 몰랐다.
전쟁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는 "남성과의 전쟁에서 여성이 희생당했다고 생각하는 깊은 잠재의식"에서 생겨났던 것은 아닐까?
p.180
이 문장이 적힌 시기는 1960대,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다루던 와중이다. 전쟁 종식을 위한 시위에 참가하던 이들은 점차 베트남에서의 폭력과 미국 내 폭력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했다.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배경과 인종, 주체만 다를 뿐 그들 자신이 겪는 일과 하등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여성운동이 부상했던 것을 보아 이분법의 근간을 깨달은 모양이다.
책에서 인용한 수전 손택의 말이 딱 들어맞는다.
"여성 억압은 조직화된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억압을 형성한다. 그 억압은 가장 오래된 해묵은 억압으로, 계급, 계층, 인종에 근거한 다른 모든 억압들보다 앞선다. 그것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계급 체계다.
p.215
우리 사회는 서너 인간들이 모여 소규모의 무리를 이루고, 그 무리들이 싸움을 통해 병합하며 집단을 이루고, 끝내 국가에 속한 형태로 발전했다. 거꾸로 돌아가 출발점을 살펴보면, 둘 이상의 인간 사이에 생긴 선긋기일 테다. 사실상 우리는 사회의 규칙이라는 명목 하에 역할 놀이를 해온 셈이다. 특정 인물이, 특정 인종이, 특정 성별이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이랄 게 어떻게 존재하는가?
암묵적 당연함이 만연한 세상인지라 가끔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소란이 벌어진다. 무엇이 더 옳고, 다른 무엇은 그르칠 위험이 있다는 식으로. 아무리 같은 목적지를 바라본다고 한들 그곳까지 향하는 길은 무수하다. 서로를 닮았으면서도 가지각색인 만큼.
"대체 여성들은 왜 그렇게 다른 여성들에게 옹졸하게 구는가?"라며 의아해했다. 종은 이 문제를 이렇게 진단했다. "자기주장을 남성들에게 맞서 내세우지 못하니 우리끼리 서로 맞서고 있다."
(중략)
체슬러 역시 이런 행동 방식의 작동 원리를 분석한 바 있다. "힘없는 다른 조직들처럼 우리 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 권력에 남성들식으로 몸으로 맞서 싸우는 것보다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말로 맞서 싸우거나 모욕을 주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308
내 옆에 있는 여성이 반드시 내가 걷는 길을 동행할 필요는 없다. 끝내 같은 지점에서 만날 게 자명하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목적지를 더 확고히 구체화하는 게 아닐까. 서로 다른 생각을 지켜보고, 지지하고, 그러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지나치며.
투쟁에 빠르고 쉬운 길은 없다. 우리에 일상에 더더욱 가까울수록,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오묘한 가치를 두고 이야기할수록, 더더욱.
다만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회운동에서도 일어나는 법이다. 조용히 정지해 있거나 심지어 퇴행하고 있는 것만 같은 시기도 사실은 도전의식을 북돋우며 미래에 필요한 전술을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p.45
아트인사이트(https://www.artinsight.co.kr/)에서 도서를 증정받아 독서 후 작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