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눈송이를 낳은 뒤 하늘은 은어의 향수처럼 푸르다"
이용악 님의 시 '국경'의 첫 문장이다. 그 문장에 반했다. 눈이 내린 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알게 되었고 은어의 향수가 궁금해졌다. 수박 향기가 난다는 은어를 먹을 수는 없었다. 은어의 향수는 푸르러야 했다. 목구멍 속에서 꿈틀거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월북했다는 이용악 님의 흔적을 따라갔다. 옛날엔 자의든 타의든 월북한, 월북된 작가의 글들은 금서였는데, 지금은 월북 후의 글까지 구할 수 있었다. 이용악 님의 두툼한 시집을 들고 신의 비밀을 캐는 것처럼 설렜다.
월북하는 과정이 담긴 시들은 박진감이 넘쳤다. 목숨을 걸고 가족과 함께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순간엔 가슴을 졸였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념을 위해 사람들은 이렇게 강해질 수 있구나, 멋있었다. 시로도 이런 분위기를 낼 수 있다니, 시인의 힘은 강했다. 하지만 그것이 커다란 복선이란 걸 역사는 이미 말해주고 있었다.
월북 후, 시에서는 새 세상에 대한 기쁨이 넘쳐나고 있었다. 하지만 시인은 행복해서는 안 되는 걸까? 시가 빛을 잃어갔다. 온몸을 깨우는 얼음장 같던 시인의 색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인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배가 처음 출항할 때 어렵사리 찾은 시인의 색채는 하늘 위를 펄럭이던 만국기처럼 작별인사를 고했다. 자신이 따르던 이념이 시인을 삼켜버린 걸까? 시인이 자신의 시를 놓아버린 걸까?
나는 시 읽기를 멈추고 작가의 행적을 찾았다. 무사하시기를 바랐다. 숙청이란 단어로 사라지지 않으셨기를...
그런데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이미 시간 속으로 사라진 시인에게서 난 무엇을 원한 것일까?
시인의 시집을 멀리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고고하게 빛나기를 바랐는데... 정치선동 같은 것에 흔들리지 않고 꼿꼿이 서 있기를 바랐는데. 책장 한편에 꽂혀 있는 이용악 님의 시집을 볼 때마다 빛을 잃어가는 자신의 시를 마주하고 눈물 흘리는 시인이 떠올랐다.
시인이란 것은 형벌일까?
난 시인이 시로만 남길 원하고 있었다. 한 인간으로서의 시인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숙청보다 더 무서운 칼날을 시인에게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빗물을 뿌리는 하늘은 시인의 향수처럼 흐리다.
시인의 향수
시인의 향기가 궁금했다.
시인은
은어의 향수처럼 푸르기를
바랐다
시인에게 현실은
시를 위한 도구일 뿐
시인은 푸른 삶을 살기를
변치 않고
푸르기를 바랐다
그런 시인의 향기를 맡고
시인의 향수를
만들고 싶었다
푸른 바닷물을 깔고
은어의 수박 향기와
새하얀 눈송이를 더하면
완벽할 거야
시인의 향수를 뿌리고 싶었다
누구 탓일까
바닷물은 탁했고
은어는 썩었고
눈송이는 녹아버렸다
시인은 탁자에 앉아
오지 않을 시간을 떠나보냈고
난 그런 시인의 냄새가 싫었다.
킁킁 내 삶 냄새를 맡는다
난 시인이 아닌데
왜 색을 잃고 빛을 잃었을까
왜 시인의 향수는 푸르기만 해야 할까
시인을 위해 향수 한 병을 만들어야겠다
회색 하늘을 깔고
소쩍새 울음소리와
투명한 빛 방울을 더하면
완벽할 거야
탁할 것도
썩을 것도
녹을 것도
없는 세상
시인의 탁자 위에 올려놓고 불을 밝혀줘야지
시인의 눈동자에서 다시 반짝
시가 떠오를지도 몰라
- 소려의 못 된 시 '시인의 향수'
오늘에야 이용악 님을 내 욕심에서 놓아주고 시집을 다시 가슴에 끌어안는다.
시인의 향기가 느껴진다.
* 참고문헌
"낡은 집" 이용악 지음, 미래사 펴냄
"이용악 전집" 곽효환, 이경수, 이현승 편, 소명출판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