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와 <노매드랜드>를 중심으로
생략을 통한 리얼리즘
유추가 가능했겠지만 <노매드랜드>와 <미나리>는 상당히 일상에 근거한 영화다. 두 영화는 모두 인물이 새로운 땅의 질서에 편입해 ‘잘’ 안착하게 되었다는 식의 끝맺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한 순간을 담는 방식으로 서사를 마친다. 재미있는 점은 두 영화가 리얼리즘을 확보하는 방식인데, <노매드랜드>와 <미나리> 모두 반복되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묘사하기보다 오히려 생략하는 쪽을 택한다.
한 번 떠올려보자. <노매드랜드>에서 펀은 이따금 지난날에 봤던 누군가를 또 다시 만나는 경험을 한다. 언니의 집을 방문했다가 나온 뒤 펀은 길에 앉아있는 한 남자를 보고 그에게 자신이 결혼식에서 읊었다는 자작시를 들려준다. 이어지는 장면에는 다시 캠핑카에 돌아와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는 펀의 모습이 나타난다. 남자를 만난 날일지 아니면 그보다 며칠 후의 일일지 알 수 없는 컷들이 지속해 등장한다. 이어 카메라는 또 다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길을 걷는 펀의 모습을 담는다. <노매드랜드>에서 펀의 여정은 종종 시간의 순서를 잊게 만들 만큼 급격한 컷 전환으로 이루어진다. 중간 중간 여정과 교차하여 등장하는 펀의 노동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펀의 노동이 개입됨으로써 이야기는 펀의 여정이 정확히 어느 지점에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와 같은 편집은 <미나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손자인 데이빗을 껴안고 잔 다음날 아침 순자는 급작스럽게 건강이 나빠진다. 마치 데이빗의 병세를 순자가 모두 앗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순자의 병세는 많은 설명 없이 악화되고, 조금은 나아질 거라고 예상되었던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도 더 다른 발전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순자의 실수로 창고가 화염에 휩싸이게 된 다음 이야기는 다시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 제이콥과 데이빗의 평온한 모습을 비춘다. 병세가 악화되던 할머니 순자는 어떻게 되었나. 불에 타버린 농장은 회복을 했나. 그런 결과론적인 이야기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이들의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듯 카메라는 일상의 순간으로 되돌아온다.
서사의 생략을 거듭한 디제시스가 이토록 생생한 하나의 현실적인 플롯이 되어 기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와 같은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삶을 돌이켜보다 문득 어제의 일과 그제의 일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늘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내일을 맞이하는 삶. 대부분 기억을 되짚을 때에 그저 파편적인 순간만 떠올릴 뿐이며 대개는 순간의 기억들이 모여 일상이 채워진다. 따라서 <노매드랜드>와 <미나리>는 결코 두 시간 동안의 러닝타임 안에 이에 대한 해결책을 담지도, 성급하게 인생의 방향성을 제시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하지도 않는다. 그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맞을 것이라는 식의 엔딩은 그 자체로 영화가 구현해낸 리얼리즘이 아닐 수 없다.
벌판이 향유하는 이미지
그럼 이쯤에서 <노매드랜드>와 <미나리> 속 반복되는 이미지가 어떻게 하나의 메시지로 기능하는지 살펴볼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두 영화에는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벌판’ 이미지가 나타난다. <노매드랜드>에서 펀은 얼어붙은 엠파이어의 땅을 지나쳐 황무지로 달린다. 영화는 캠핑카 안에서의 펀보다 캠핑카 바깥에서 생활하는 펀의 모습에 더 주목한다. 그녀가 머무르는 황야의 석양을 보고 있노라면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충분하다. 낭만적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자칫 ‘그녀가 왜 엠파이어를 떠나 유목할 수밖에 없었는가’와 같은 사회적 비극을 잊게 된다. 나아가 카메라는 노상방뇨를 하는 펀의 모습을 담을 때에도 펀의 시각이 아닌, 자연 속에 펀이 담긴 익스트림 롱숏을 택한다. 너른 땅의 풍광을 배경으로 노상방뇨를 하는 인물의 모습은 그녀가 노상방뇨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주목하기보다 상황이 벌어지는 공간을 담아내는 데 주력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미나리>는 어떠한가. 초록색의 드넓은 풀밭으로 이루어진 아칸소 땅은 심장 질환을 앓고 있어 마음껏 뛰어 놀 수 없는 어린 아들 데이빗의 지병을 잊게 만들 만큼 자연친화적이다. 농작물을 심을 수 있는 드넓은 황야의 이미지는 관객으로 하여금 묘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눈여겨볼 점은 이 이미지가 담고 있는 공간적 여백이다. 벌판은 비어있다. 비어있는 곳은 달리 말하면 무언가 자라날 수도, 지어질 수도 있는 공간이다. 고층 빌딩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심에는 무언가가 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발붙일 겨를을 주지 않는 땅은 결코 기회의 땅이 될 수 없으므로 이동하는 자에게 성장 가능성을 차단한다. 따라서 이들이 잠시 머물러도 될 만한 곳인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너른 땅은 자신들이 무언가를 일궈낼 수 있는 곳인가에 대한 가능성을 가늠하게 하는 요소다. 이는 현대의 많은 영화들이 ‘변화에 따른 위기’를 암시할 때 인물을 대도시의 비좁은 공간으로 몰아넣는 것과 반대되는 행보로, 영화가 은연중 내포하고 있는 희망적인 메시지다. 영화 <미나리>에서 ‘미나리는 아무에서나 잘 자라.’ 라는 대사에서 느낄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과 의지는 여러 번 되풀이되는 벌판 이미지를 통해 종국에 그렇게 살아가리라는 기대감으로 탈바꿈할 가능성을 거머쥐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시리즈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