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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달 Sep 02. 2020

의심을 단죄할 수 없다는 비극

죄 많은 소녀, 그보다 더 죄 많은 사람들 

  누구든 살면서 한 번쯤은 겪어본 적 있을 것이다.
명백한 귀책을 물을 수 없는 사건에 대하여
어쩐지 모든 정황이 나를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 같은 경우.
무슨 말을 내뱉어야 할지 모르겠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인들의 차가운 시선이 내게 어떠한 변명을 요구하는 순간.
그런 상황에 강제로 세워졌다면 과연 어떠한 답을 내놓아야 할까.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숨 막히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영화 <죄 많은 소녀>의 영희는 경민의 마지막 시간에 동승했다는 이유로 주변인들의 의심을 산다. 영희가 하지 않은 말은 경민을 궁지로 몰아세운 말이 되고, 영희가 경민과 주고받았던 애착의 감정은 영희가 경민에게 전이한 ‘마땅히 죽음에 이를법한’ 음울함으로 낙인찍힌다. 영희는 경민이 왜 죽게 되었는지 묻는 무수한 폭압적 질문들 앞에 이렇게 항변한다. ‘내가 먼저 죽으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억울함이 밴 영희의 목소리는 그녀가 심연으로 침전해 버리기 직전 세상을 향해 가장 크게 외친 소리이다. 하지만 쥐어짜 내어 터져 나온 고름처럼 내뱉은 소리는 ‘경민의 장례식에서마저도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는’ 이기심으로 치부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아채버린 죗값이 이렇게 큰 걸까. 이미 진행되어버린 친구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되갚아 결백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 책임을 묻는 지독한 채찍 앞에서 영희는 중얼거린다. ‘내가 먼저 죽을걸.’ 이 말을 내뱉은 영희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스스로 생을 앗으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생명은 부지한 채 ‘변명으로 보이는 것조차 할 수 없도록’ 목소리만 잃는다.


<죄 많은 소녀> 영희 역의 전여빈 

  영화 속에서 의심은 충분한 위용을 드러내며 죽음보다 묵직한 형태로 영희 근처에 매달려있다. 이제 의심의 증거는 영희의 목에 난 구멍처럼 소녀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생채기로 머문다. 학교 사람들은 영희가 자살을 감행했다는 소식에 변화를 감응하고 태세를 전환한다. 이 지점에서 프롤로그 장면 속 명도가 낮아 거의 그림자처럼 보이던 학생들의 실루엣이 연상된다. 그들은 자신이 또 다른 영희가 될까 전전긍긍하는 형체 없는 예비 희생양들이다.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되었을지도 모를 테두리 안에서 의심은 그들이 궁극적으로 택한 하나의 사회적 생존 양식이다. 그렇다면 경민 모는 어떠한가. 


<죄 많은 소녀> 경민 모

  그녀는 딸의 실종 사실을 안 뒤로 튀어나오는 구역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수사를 중단하려는 경찰들에게 화를 내며, 영희의 자살 시도 이후에도 병실로 계속 찾아온다. <죄 많은 소녀>의 전개가 학교의 관료제나 또 다른 실체 없는 소문으로 다소 산만하게 분산되고 있음에도 시종일관 긴 터널 속에 갇혀 질식해버릴 것 같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이 경민 모의 병적인 의구심이 큰 몫을 한다. 그녀는 너덜너덜해진 환부를 봉합해 보이기를 거부하고 날 것의 이면을 관찰하려 든다. 영희가 경민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이제 영희가 경민의 자살 이유를 알 수도 있다는 의심에서 그녀가 경민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으로까지 번진다. 그녀의 의심은 희망과 관용 그리고 집착의 형태로 모양새를 달리하며 영희 곁을 맴돈다. 

<파수꾼> 속 아버지(조성하)

  하지만 경민 모 내면의 기저에는 <파수꾼>의 아버지(조성하)가 그랬듯 회피하고 싶은 불안감이 깔려있다. ‘당신 때문이 아니라는 얘기가 듣고 싶어요? 비겁해.’ 동윤(서준영)의 말을 들은 후 헛구역질을 했던 <파수꾼> 속 아버지의 얼굴은 ‘나만이 경민이를 살릴 수 있었어. 이제 내일이면 당신도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될 거예요.’라고 말하는 영희 앞에서 칼을 들고 자신을 찌르기 시작하는 경민 모의 얼굴과 겹쳐 보인다. 그러나 전자가 어쩔 수 없이 자책을 받아들이게 된 과정이라면 후자는 죄책을 체감하기 두려워 자책에 다가서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몸부림에 가깝다. 


  고대 성서에는 강도를 만나 죽음의 위기에 처한 자를 한 사마리아인이 발견해 구해준 데에서 비롯한 ‘착한 사마리아인’ 일화가 있다. 이를 후대의 프랑스에서는 ‘위험에 처한 자를 충분히 도와줄 수 있음에도 도와주지 않았을 경우 죗값을 묻는’ 식으로 도덕적 의무를 법으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작은 의심의 씨앗이 싹튼다. 과연 ‘충분히 도와줄 수 있다’의 정도는 어떻게 규정되는가. 영희는 경민의 죽음을 충분히 예측하고 막을 수 있었는가. 경민 모는 딸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는가. 의심은 다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실체 없는 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영화에서 비극은 의심이 누군가를 단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의심을 그 누구도 단죄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러기에 <죄 많은 소녀>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순간, 영희는 타의적이든 자의적이든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의심이라는 터널의 길목에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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