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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현 Feb 17. 2022

기억되지 않는 진실로 나아가는

연극 <왕서개이야기>


출처: 이데일리


연극 <왕서개 이야기> 2018 남산예술센터의 창작희곡 상시투고시스템 ‘초고를 부탁해에서 발굴된 작품이다. 미완의 희곡을 개발하는 ‘서치라이트낭독 공연을 거쳐, 올해 남산예술센터의 시즌 프로그램  작품으로 무대에 올랐다. 연극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왕서개라는  개인이 4명의 전범자를 만나는 여정을 순차적인 순서로 보여준다. 사건 당사자들과 마주하고 진실을 찾아 나가는 왕서개의 행동이 서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구축한다. 명망 있는 대학교수 이치고, 외무성의 고위직 관리가  임팔, 죽음을 맞은 니카노, 하반신 불구가  릴리와 마주하는 왕서개의 이야기가 그의 여정을 따라, 무대 위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마주하는 인물들

연극은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의 상인 왕겐조가 대학교수 이치고의 집에 물건을 배달하러 오면서 시작된다. 현재는 왕겐조라고 불리지만, 왕서개라는 이름의 남자는 1930년대 만주에서 일본군에 의해 아내와 딸을 잃었다. 그는 만주의 매사냥꾼이었지만, 일본 군인 5명에 의해 마을 전체가 몰살당하는 사건으로 삶의 전부를 상실한다. 연극은 1930년대의 전쟁 상황과 1950년대까지의 전후 상황을 설명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극 전면에 드러난 전쟁의 역사 속에서 희생당한 한 개인의 이야기에 현실을 반영해 드러낸다. 극장에 들어서면 반원형의 객석 구조 앞에 간소화되었지만, 깊이감 있는 무대가 눈에 들어온다. 무대 안쪽으로 향할수록 경사가 가팔라지는 나무로 된 바닥과 그 가운데에 책상과 의자만이 놓여있다. 무대 또한, 특정한 배경이나 장소를 재현하지 않는다. 공간은 최소화된 대소도구들과 인물 간의 대사를 통해 구축된다. 이와 같은 공간의 연출은 인물들 간의 대사와 몸짓이 주요하게 작동하는 극에서 무대 위 인물들의 존재, 관계성에 시선을 온전히 집중시킨다는 점에서 적합했다.

궤짝이 오래되어 보인다는 이치고의 말에 왕서개는 꺼내놓지 못했던 진실을 드러낸다.  궤짝은 희생당한 딸의 관이었고 이치고가 가해자   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단정한 양장 차림을  이치고의 외양과 상인 차림의 왕서개의 모습은 시각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나무로  바닥은 이치고의 움직임에 따른 구두 소리를 극대화하고 소유자로서 공간을 점유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진실이 드러난 , 이치고의 심리적 불편함은 온화한 태도와 목소리에서 벗어나 안경을 고쳐 쓰고 소리치며 분노하는 배우의 연기로 형상화된다. 왕서개가 이치고의 자백서를 들고 만난 임팔은 천왕의 생일잔치에 가기 위한 연미복 차림을 하고 있다. 임팔의 등장에 따라, 무대  새로 설치된 거울은 계속해서 그의 모습을 비춘다. 그에게 주요한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와 나아갈 미래였다. 어떤 가해자는 존재하지조차 않았다. 니카노는 왕서개가 찾아오지 않은 21년의 시간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왕서개가 마지막으로 만난 릴리는 하반신 불구 상태였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왕서개에게 오히려 과거 이야기 자체가 즐겁다는 목소리와 태도로 매사냥꾼 시절의 기억을 들려달라고 부탁한다.​


전쟁 속에 가려진 진실이 드러나고 극대화되는 순간, 붉은빛의 조명이 무대 오른편에서 강하게 인물들을 비춘다.  조명은 인물들의 상세한 표정을 가리고 관객이 인물의 형체만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렇게 인물들은 서로 다른 층위를 보이는 하나의 개인이자 가해자인 동시에 전쟁 결과로 만들어진 군상의 모습을 보인다.



참사 뒤의 남은 것들을 대하는

왕서개의 행위에서 주요한 지점은 그가 21년이 지난 다음,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점과 행위의 과정에 있다. 표면적으로는 가족과 삶을 파괴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왕서개의 행동이 복수를 위한 것으로 비추어진다. 그러나  과정에서 왕서개는 그들에게 직접적인 복수를 행하지 않는다. 왕서개는 복수가 아닌, 죽음에 대한 진정한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가해자들이 ‘전쟁이라는 참사 특수성을 이용해 범죄 행위를 돌아보지도 않은 , 망각하고 합리화하기 시작하며 상황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치고는   없는 전투 가운데 만주 사냥터에서 있었던 사건을 사사로운 일이라고 칭한다. 과거의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이치고의 집에 마차가 도착한다. 그에 따라 고조되는 말발굽 소리가 가득 공간을 메우고 21  학살의 상황을 상기한다. 이는 과거의 사건이 여전히 현재, 그리고 인물들과 연결되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임팔은 군인에게 특별한 죽음은 없다고 말하며, 전쟁에서 자신의 범죄 행위를 기억하지 못한다. 피해자의 죽음은 그저 수많은 죽음  하나로 취급된다. 전쟁에 환상을 가진 , 자신의 이익에 맹목적인 충성을 다하는 과장적인 행동은 웃음을 유발하는 동시에 섬뜩한 감각을 자아낸다.​


죽은 니카노의 부인 하나코는 무의미하게 바닥을 닦는 반복적인 행동을 보인다. 왕서개가 남편과 과거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그는 바닥을 닦고 있을 뿐이다. 무언가를 애써 지워내며 외면하려고 하는 행위가 드러난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하나코는  다른 전쟁 피해자로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아들에게 왕서개의 방문을 철저히 숨기려 하며, 과거에 대한  어떤 진실도 인정하지 않은  회피한다. 릴리는 진실을 찾는 왕서개의 행동을 비하한다. 릴리로부터 시체가 묻히지 않고 사냥개들에게 먹이로 주어졌다는 잔혹한 사실이 허무하게 드러난다. 왕서개는 릴리의 다리를 쏘지만, 릴리는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허무함은 진실을 향해 나아가던 왕서개를 무겁게 좌절시킨다.


21년이 지난 , 진실을 요구하는 왕서개에게 돌아온 대답은 진실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 지금에서야진실을 묻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과거를 기억할 필요도,  속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인정할 필요도 없다. 철저히 전쟁을 통해 얻게  현재 상황에 만족을 느끼거나 부당함, 좌절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왕서개는 학살의 원인이었던 사냥꾼들의 집단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두려운 감정에 싸여 21년이라는 시간 동안 행동하지 못했다.  기다림 속에서 왕서개는 기억하기조차 어려운 사건과  흔적을 상흔으로 안고 살아왔을 것이다. 왕서개가 항상 지고 다니는 딸의 관은 인물들에 의해 술상이 되거나 찻상으로 대체되거나 내던져지기도 한다. 왕서개는 이를 제지하지 못한다. 그렇게 기억과 고통의 층위가 한순간에 타인에 의해 대체되어 버리고 복수가 아닌 진실만을 좇는 행위가 이질적으로 감각되는 현실이 드러난다.​


작품이 일본과 중국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는 실제 역사적 배경의 영향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한국의 관객이 거리를 두고 작품을 바라보게 한다. 직접적인 우리의 역사를 다뤄낸 경우와 비교해 다른 시공간의 이야기를 다룬 데서 오는 약간의 거리감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연극이 관객에게 가닿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미해결된 문제와 상처에 관한 이야기가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릴리를 마지막으로 왕서개는 텅 빈 무대에 홀로 남아 매를 부른다. 매는 그림자를 보이며 주변을 맴돌다, 그의 팔에 앉지 않고 날아 가버린다. 왕서개는 돌아와서 복수하라고 소리치지만, 매는 떠나가고 극은 끝이 난다. 일본군 다섯 인물 중 한 명은 끝내 설명되지도, 등장하지도 않는다. 현재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겨나고, 진실을 위한 피해자들의 노력과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회에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된다. 왕서개에게 왜 지금에서야 진실을 찾냐고 물었던 그 질문들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 한 명은 인물이 아닌, 진실이 드러나지 못한 채, 망각되어지는 사건들이 쌓여가는 사회의 현실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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