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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수 Feb 16. 2022

좀 놔두시면 안될까요?

'훌륭한' 아버지 옆 주눅든 아들


-미리 밝히지만 지역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일 뿐 입니다.-


울산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울산은 알다시피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에 직접 근무 혹은 하청회사 직원, 그 가족들까지 해서 '현대 사람들'이 거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모 법인 산하에 취업지원 사업부를 두고 민간위탁사업을 운영했는데 근무하는 직원 8~10명이 둘러앉아 점심을 먹을 때면 간혹 '현대' 관련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직원 대부분의 나이가 2~30대였는데 내가 흥미로워서 '현대' 다니는 집 손들어보랬더니 직원 대부분이 당연하듯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을 정도이다.


현대 정직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는데 그럴 만도 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력하고 큰 노조를 가지고 있는 덕에 급여나 근로 복지 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근무경력이 오랜 사원들은 어지간하면 4~5층짜리 원룸 건물을 가지고 임대업을 병행하며 제법 '배부르고 등 따신' 생활들을 하고 있었고 현대 직원 명찰을 단 직원들은 집에서도 '능력 있는 아버지, 남편'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그 당시 재밌게 본 통계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울산의 젊은 여성들이 '눈이 높아서' 타지역에 비해 미혼율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본인들 스스로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또 다른 면에서 울산의 젊은 남성들은 다른 도시 남성들에 비해 제조업 근무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더란 것이다.


소위 '공장노동자'로 근무하는 것에 대한 문화적, 정서적 거부감이 체감상 타 도시에 비해 낮은 것 같았다. 비슷한 학력의 부산지역 청년들과는 분명히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두 도시의 제조업 평균 임금을 비교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겠다.


<2021. 11월 기준. 부산의 평균 임금은 356만 원인데 비해 울산의 평균임금은 433만 원이다. 제조업 임금 차이는 더 크다. 부산의 주 산업은 서비스업, 자영업이라면 울산은 제조업이 대표 업종>



이런 배경 탓인지 모르지만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울산의 남성 청년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눌려 맥을(?) 못 추는 분위기를 많이 연출했다.


상담 과정에서 본인의 선택이나 판단보다는 '집'에 물어보고 결정하는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 어떤 경우는 아버지가 동행해서 상담실까지 함께 들어오려다 제지당하기도 했다.


한 번은 한 청년이 상담 기간 단축이 안되는 걸 자꾸 고집해서 애를 먹고 있었는데 '집'에서 그렇게 해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집에서 그걸 왜 요구를 하는지 이해를 못 하던 차에 어느 날 청년의 아버지가 직접 기관에 찾아오신다길래 나도 좀 긴장이 되었다.


막무가내로 따질 것에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설명 자료들을 이것저것 챙겼는데 막상 만나보니 그 아버지는 깍듯한 매너를 보여주었다. 대기업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 보이는 시스템과 규정에 익숙한 특유의 정제된 매너였다. 그는 현대 자동차에 근무하고 있었다.


"아버님, 제가 00씨에게 설명드렸다시피 상담 기간은 규정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드릴 수 있는 재량이 없어요."


"사실은 회사에서 00일부터 인턴 프로그램이 있어서 거기에 참여시키려면 기간이 안 맞아서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상담과 훈련 지원을 받을 것인지 회사 인턴으로 갈 것인지에 대해 청년에게 물었더니 우물거리며 답을 제대로 못한다.


그 질문에 정답은 없다. 상담과 훈련 지원을 받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할지 회사 인턴으로 가는 것이 유리할지 그건 선택의 문제였다.


그렇다면 의견 정도는 낼 수 있을 텐데도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입장에서 그 자리의 결론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와 좀 더 대화가 필요했다. 청년을 내보내고 상담실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버님, 00씨가 상담 시간에 무엇을 물어보면 자기가 결정을 못 해요. 어른과 의논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만, 다른 경우와 비교할 때 00씨가 아버님에 대한 의존도가 아주 높아 보여요"


"허헛.. 그런가요. 제가 집에서는 좀 엄격한 편이긴 합니다. 공부도 그리 썩 잘하지 못해서 제가 일하는 동안이라도 챙겨야지 싶어서 이것저것 시키다 보니..."


"마음은 이해됩니다만, 멀리 볼 때 아이의 자율성을 훈련시켜주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뭐 대단한 것은 아니고 본인이 결정하게 하고 작은 성취가 있으면 칭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선생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 저 대신 선생님께서 잘 지도해 주십시오. 저놈이 집에서도 말이 없다 보니 도대체 뭘 원하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지켜봐 주시고 기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요. 아예 모른척하시라는 말씀이 아니라 반발자국 뒤에서 같이 간다는 마음으로.."


지역을 떠나 상담에서 만나는 '훌륭한' 혹은 '욕심 많은' 부모 옆의 주눅 든 청년들은 혼자 뭔가를 결정하는 것을 너무 힘들어하고 제일 어려워했다.


진로, 훈련 선택, 구직활동 모든 분야에서 그랬다. 그러면 세상과 부딪칠 기회가 그만큼 줄어든다. 한 번의 선택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님에도 오류와 시행착오를 겪는 것을 너무 두려워한다.


내 입으로 '반발자국 뒤에서'라고 말했지만 나 역시 좀 마음에 안 들고, 생각만큼, 계획만큼 잘 안 커주는 자식을 어디까지 '컨트롤'해야 할지 참 어려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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