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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글 Oct 27. 2024

5부 : 심판 (6)

  그날 밤.

  오랜만에 볼펜을 잡은 두오가 문득 옆을 쳐다봤다. 동료 수감자들은 이미 이불을 덮은 채 코를 골며 자고 있었지만 두오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까 면회실에서 마음먹은 일을 지금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어느새 주름이 가득해진 손으로 펜을 쥐어 보았다. 손으로 글을 써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두오는 펜을 굳게 쥔 채 다정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몇 달 전, 보육원에서 그 남자를 만났던 일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그 사람을 죽이게 됐는지에 대해.


  그날 일은 아직도 두오의 기억에 선명하다. 아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은 희망 보육원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두정을 그렇게 보낸 후에도 두오는 희망 보육원의 안 원장에게 종종 방문해서 쌀과 반찬들을 전해주곤 했다. 동생의 마지막을 함께 해준 원장이 고마웠고, 잠시나마 다윤을 돌봐 준 원장에게 감사했기 때문이었다.

  거실에서 짐들을 정리하고 있는 동안 다윤이 다가왔다.

  “아빠, 어디 가?”

  “보육원. 아빠 가끔 가던 곳 있잖아.”

  그 말에 다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다윤의 말에 두오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다윤이가 여러 사람을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곳은 다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니까.

  자동차의 시동을 걸자 경쾌한 엔진소리가 났다. 다윤은 뭐가 그렇게 흥겨운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두오는 그런 다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날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날인 줄도 모른 채.

  한 시간 정도 흐른 후 자동차가 보육원에 도착했을 때 다윤은 이미 쿨쿨 자고 있었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린 두오는 트렁크의 짐을 모두 꺼낸 후 조수석의 다윤을 깨웠다.

  “벌써 왔어?”

  다윤이 눈을 비비며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짐 중에서 가벼운 것을 양손에 들고는 두오를 따라갔다.

  “안녕하세요.”

  두오가 앞마당에 나와 있는 여자에게 인사를 하자 다윤 역시 처음 보는 그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보육원의 안은자 원장이라고 소개한 그 사람은 다윤이 보기에 굉장히 기품 있는 사람이었다.

  “어서 오세요, 두오 씨.”

  안 원장이 미소를 지으며 환대했다.

  “매번 감사해요.”

  두오가 들고 있는 쌀 포대와 다윤이 들고 있는 반찬통을 보면서 안 원장이 말했다.

  “뭘요, 제가 신세 진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근데 이 아이는…….”

  안 원장이 다윤을 바라보자 두오가 잠시 머뭇거렸다.

  “딸입니다. 둘째 딸이요.”

  안 원장이 두오를 바라보자 두오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안 원장이 미소를 지었다.

  “네가 다윤이구나. 반가워.”

  19년 만에 다윤이와 재회한 안 원장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녀의 머릿속에 그 옛날 이곳에 찾아왔던 두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은 트렁크 하나를 들고 외로운 모습으로 이곳에 찾아온 두정. 그녀의 절친한 친구가 안 원장의 조카였기에, 조카의 부탁을 들은 안 원장은 선뜻 두정을 환영했다.

  “어서 들어오셔요.”

  안 원장의 안내에 건물 안으로 들어온 두오와 다윤은 쌀과 반찬통들을 부엌에 내려놓고 응접실로 향했다. 가운데에 초라한 나무 탁자가 놓였고 양쪽으로는 가죽 소파가 둘씩 놓여 있었다. 두오가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다윤이 그에게 다가와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아빠, 나 쟤들이랑 있어도 돼?”

  두오가 창밖을 바라보니 아이들 몇 명이 줄넘기하고 있었다. 두오가 “그럼.”이라고 대답하자 잔뜩 신이 난 다윤이 바깥으로 달려갔다.

  “정말 예쁘고 바르게 자랐네요.”

  밖에서 아이들이랑 놀고 있는 다윤을 바라보며 안 원장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됐어요. 다 원장님 덕분입니다.”

  두오가 고개를 숙이자 안 원장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정 씨 소식을 듣고 마음이 정말 아팠어요. 하지만 저렇게 예쁘게 자란 다윤이를 보니…… 분명 두정 씨도 하늘에서 기뻐하고 있을 거예요.”

  “저도 그랬으면 합니다.”

  “이따 저녁에 손님분들이랑 같이 식사를 할 텐데, 같이 드실 거죠?”

  “그럼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 후 안 원장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남은 두오는 말없이 응접실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복도로 나갔다. 응접실 문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쭉 걸어가자 복도 끝에 작은 문이 하나 나타났다. 두오는 숨을 죽인 채 그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빈방에는 나무로 된 옷장과 테이블, 그리고 이불과 베개가 있었다.

  하나도 안 변했구나.

  동생이 몇 달 동안 살았던 방을 쳐다보면서 두오가 중얼거렸다. 그때 이후로도 몇 번 들어온 적이 있었지만 올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 숨을 쉬며 앉고 누웠을 동생을 생각하자 눈물이 나왔다. 19년 전 텅 빈 이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떠오른 두오가 동생에 대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저녁이 되자 보육원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각자 방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밥을 먹고 있었고, 어른들은 따로 부엌에서 저녁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아이들과 놀던 다윤은 어느새 부엌에서 부지런히 반찬들을 그릇에 담고 있었고, 두오는 부엌 옆에 있는 창고에 쌀 포대를 옮기고 있었다.

  “아빠, 거의 다 돼가.”

  “응, 아빠도 다 끝났어.”

  무거운 포대를 옮기느라 기운을 뺀 두오가 심호흡을 몇 차례 했다. 이마와 관자놀이 부근이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었다.

  “다윤아, 원장님은 어디 계시니?”

  “지금 응접실에 계실걸? 아까 손님들이 오시더라고.”

  다윤이 반찬을 담다가 아빠를 빤히 쳐다봤다.

  “아빠, 세수하고 와야겠다.”

  어느새 목까지 땀으로 흥건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두오가 “그래.”라고 대답하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 앞에 선 채 얼굴에 차가운 물을 끼얹자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졌다. 헐떡거리던 숨도 이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했다. 문득 두오는 이 화장실이 아까 그 빈방과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생도…… 이 화장실을 사용했겠지. 여기서 손을 씻고, 세수하고, 이를 닦으며 몇 달 동안을 살았겠지. 다시 동생에 대한 감정이 올라오려고 하자 두오는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고는 얼른 화장실에서 나왔다.

  두오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거실 방향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났다. 거실에 나가보니 안 원장이 출입구에서 젊은 청년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매번 감사드려요, 진우 씨.”

  “뭘요.”

  이야기 중인 두 사람을 지나 출입구 밖으로 나가자 시원한 바람이 두오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몇몇 아이들은 벌써 저녁을 다 먹고 마당에서 놀고 있었고, 그 모습을 두 남녀가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아이들을 향해 다가가던 두오는 무심코 반대편에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오른쪽엔 중년의 여성이었고 그 왼쪽엔…….

  그 순간 두오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을 받은 두오가 떨리는 손으로 겉옷 안쪽 주머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냈고, 그중 한 장을 손에 쥐고는 뚫어지라 쳐다봤다.

  19년 동안 매일같이 저주했던 남자. 두오는 사진 속 남자와 반대편에 서 있는 남자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분명히 같은 사람이었다. 세월의 흐름 때문에 사진보다 더 늙어 보이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분명 같은 사람이었다.

  그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 원장이었다.

  “저녁 드셔요.”

  “저기, 원장님.”

  두오가 자기도 모르게 안 원장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저 남자분은 누군가요?”

  “누구요?”

  안 원장의 물음에 두오가 손가락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아, 저분은 진우 씨 아버님이세요.”

  “진우 씨요?”

  “네. 진우 씨는 저희를 후원해 주시는 회사에 근무하고 계세요.”

  “그런 분의 아버님이…… 어떻게 여기에 온 건가요?”

  두오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쿵쾅거렸지만 안 원장은 태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원분과 그 가족분들이 가끔씩 오셔서 봉사활동을 해주시거든요.”

  “그러면…… 혹시 저분의 이름을 아시나요?”

  두오의 질문에 안 원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오늘 처음 뵙는 분이라 성함은 모르겠어요.”

  안 원장의 대답에 두오가 “그렇군요.”라고 대답한 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집요하게 물으면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엌으로 가자 어느새 다윤이 와 있었다. “아빠, 여기.”라고 말하는 다윤의 옆자리에 앉자 이내 복도에서 안 원장과 아까 그 청년, 그리고 청년의 부모가 부엌에 들어왔다.

  식사하는 동안에도 두오는 밥이 아니라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었다. 젓가락을 한 번씩 쓸 때마다 반대편의 남자를 힐끔거리며 훔쳐봤지만, 아무리 봐도 사진 속의 그 남자가 분명했다. 자신이 매일같이 저주하고 증오했던 남자, 동생을 버려 죽게 만든 그 남자.

  두오의 머릿속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으로서는 저 남자의 이름도, 사는 곳도, 연락처도 알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던 와중에 한 가지가 번뜩 떠올랐다. 두오는 고개를 들어 반대편 남자를 훔쳐봤다. 정장 차림이었지만 재킷이 없는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재킷도 없이 와이셔츠만 입고 오지는 않았을 텐데…….

  그 순간 아까 다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응접실에 계실걸? 아까 손님들이 오시더라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두오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식탁을 둘러싼 모든 사람이 그를 쳐다봤고, 다윤이 “아빠, 왜?”라고 묻자 “화장실.”이라고 대답하고는 서둘러 부엌 밖으로 나왔다.

  종종걸음으로 움직인 두오가 어느새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어두운 실내의 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왼손으로 문 옆의 버튼을 누르자 불빛이 켜졌고 두오는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옷걸이가 구석에 있었는데…….

  그 순간 테이블 왼쪽 구석에 놓여 있는 옷걸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있다.

  그 남자가 입은 정장 바지와 똑같은 색깔의 재킷이 걸려있었다. 걸음을 옮긴 두오가 재킷을 들고 바깥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반대편도 마찬가지였다. 허탈함과 불안이 함께 몰려왔다.

  이번에는 재킷 안쪽 주머니를 살펴봤다.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봤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점점 거세지는 불안감을 애써 진정시키며 반대쪽 주머니에 손을 넣자…… 뭔가 만져졌다. 두오는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손에 잡힌 물건을 꺼냈다.

  갈색 가죽으로 된 네모난 물건이었다. 크기가 딱 명함 크기였다.

  명함 지갑인가?

  두오가 지갑을 열자 두껍고 하얀 명함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두오는 그중 하나를 천천히 집어 올렸다.

  우태우.

  이게 저 남자의 이름인가?

  오랜 시간 동안 묵혀놓았던 원한, 그 원한의 대상이 점차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두오는 명함 한 장을 주머니에 슬쩍 넣고 재킷을 옷걸이에 도로 걸어놓은 다음 조심스럽게 응접실을 나왔다.

  부엌으로 가자 그곳에는 다윤밖에 없었다.

  “아빠, 속 안 좋아?”

  걱정스러운 다윤의 물음에 두오는 “괜찮아.”라고 대답하고는 다윤을 데리고 거실로 나왔다.

  “다윤아, 원장님이랑 아까 그 사람들은?”

  “아이들 목욕시키러 욕실로 갔어.”

  “얼른 가자.”

  두오의 재촉에 다윤이 “잠깐만, 옷 좀.”이라고 말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순간, 복도 반대편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그 남자라는 것을 알아채자 두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조금씩 다윤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두오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뚜벅뚜벅.

  남자의 구두 소리가 멈추자 다윤은 옷을 양손에 든 채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의 시선이 다윤에게로, 그리고 두오에게로 향했다.

  “딸이신가요? 예쁘네요.”

  그 순간,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감정이 두오를 덮쳤다.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한 그 감정은 어느새 두오의 온몸을 짙은 안개처럼 덮었고, 곧 그의 전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감정이 무엇인지 두오는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살의.

  이 사람을 죽이고 싶다.

  이 사람을 죽여야 한다.

  이 사람을 죽일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네.”

  이렇게 대답했지만, 그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자아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니, 당신 딸이잖아!

  하지만 지금 이 남자는 자신의 딸도 알아보지 못한다.

  두오는 다윤의 손을 잡은 채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다윤을 급히 자동차 조수석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원장님한테 인사 안 하고 가도 돼?”

  다윤의 물음에 두오는 “괜찮아.”라고 대답하고는 액셀을 밟았다.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 여전히 떨리는 손, 조금씩 붉어지는 눈…….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옆을 보니 다윤이 그새 잠들어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씩 두정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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