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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Jun 28. 2020

세상에 없었던 말차 입문기 (5)

어부의 다도


경복궁역 근처에 새로 단장한 다실 공간이 있다고 해서, 여름 화과자를 사들고 방문해 보기로 했습니다. 차를 위해 꾸며진 공간에 찾아가는 일은 언제나 설레지요!



해가 잘 드는 전면창 안으로 족자 하나, 화병 하나가 있는 공간은 다다미 2장 크기였는데, 네 사람이 마주보고 앉을 만했습니다. 차를 만들어서 서로 나누어 마시고, 기물을 감상하고, 가운데에는 화과자 접시를 놓을 수도 있었지요.


그러니 자연히 흘러간 생각이 있습니다.


'다다미 넉 장 반' 은 별로 좁은 공간이 아니었잖아?


다다미 네 장 반


'다다미 넉 장 반' 은 센 리큐가 정립한 말차 다도에서 다실의 표준 크기입니다. 보통 어떤 맥락으로 등장하느냐 하면, '리큐는 귀족적이고 화려한 기존 다도 문화의 허식을 없애고, 다다미 넉 장 반이라는 좁은 다실에서 소박한 미의식을 추구했다.' 라고 합니다. 벽을 화려하게 장식하지도 않고 흙을 바른 그대로 두었다거나, 쓸쓸한 분위기마저 맴도는 조촐한 곳이라는 설명이 더해져 리큐의 다다미 넉 장 반은 그야말로 비좁은 골방인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 좁은 방 안에 넷이서 들어앉아 궁색하게 뭐 하는 짓이람!" 이라고, 저는 한때 리큐의 다회기 중 손님이 셋이었던 기록을 보며 말했었는데 저는 속으로 그 말을 취소했습니다. 오늘 다다미 두 장 안에 넷이 앉아 보니, 이보다 두 배 더 큰 다실에 네 명이 있으면 넉넉하고 뭐 딱 좋겠다 싶겠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현대에도 다다미 넉 장 반이라는 수식어가 일상에서 쓰입니다. 다실 말고 그냥 다다미 넉 장 반이라고 하면, 원룸 중에서도 살 수 있는 최소한의 크기쯤 되는 방을 일컫습니다. 가로세로 7.45㎡ 정도로, 부엌이 딸린 원룸에서는 부엌 공간을 뺀 크기쯤이고 보통 고시원보다는 좀 더 큽니다. 리큐의 소박하고 조촐한 다실은 현대 서민의 집 한 채 크기입니다.


'책을 사는 건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산 책을 수납할 수 있는 부동산이 있느냐이다.' 라는 말이 널리 공감을 얻는 현대 서민들은 한정된 공간 안에 가구며 가전, 생활 용품이나 취미 용품까지 집어넣기 위해 공간을 분리하고 선반을 달고 서랍이 딸린 침대를 사는 등 온갖 방법을 궁리합니다. 그런 현대인의 시선으로 생각해 보면 센 리큐는 럭셔리의 지표입니다. 무려 방 하나 크기'나' 되는 공간 전체를 오직 차를 마시기 위해 할애하다니요. 사치스러워도 이렇게나 사치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현대에 다도를 제대로 배운다고 하면 소박함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21세기에 다도의 상징은 여유, 마음을 비우고 나를 들여다보는 선(仙), 고상한 교양을 함양하는 고급 문화입니다. 10년도 넘게 수업료를 내고 다녀야 하기도 하고 갖춰야 할 물품도 많습니다. 조촐하다는 다실은 현대어로 번역하면 미니멀리즘 인테리어입니다. 미니멀리즘의 키워드는 럭셔리이고요.



일본 다실과 미니멀리즘 인테리어인 거실. 둘은 어쩐지 비슷한 속성을 공유합니다.






'리큐는 럭셔리한 귀족 문화를 즐기면서 소박한 척이나 하던 위선자다!' 라고 주장할 생각은 아닙니다. 다다미 넉 장 반이 넓다는 인상은 21세기 현대 서민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잠시 문화를 보는 기준을 15세기로 되돌려, 15세기 사람인 센 리큐에게 타당한 시선으로 그를 평가해 보면 리큐는 파격적이고 대단한 다인입니다.


그 시대는 신분제 사회였고, 다도는 처음부터 재력과 사회적 권위를 갖춘 지배층이 향유하기로 전제된 문화였습니다. 귀족, 무사, 명망 있는 유지나 상인들이 다도를 즐겼으며, 리큐가 다다미 넉 장 반의 다실에서 정립한 다도와 비교되는 기존 차 문화는 그야말로 호화의 극치였습니다. 수십 명도 앉을 수 있는 널따란 거실에다 족자며 온갖 사치스러운 기물을 장식으로 놓고, 차, 식사, 술, 그런 자리에서 즐길거리로 필요한 다른 온갖 놀이들까지 결합한 대 연회라고 해도 좋았지요. 리큐는 세 장이나 걸어야 했던 족자를 한 장으로 줄이고, 다다미 열 장은 너끈히 넘는 공간도 네 장 밑으로 줄이고, 장식하는 물건들의 양도 줄이고, …… 하여간 엄청 줄였습니다. 물 담는 그릇 하나를 써도 명인의 작품이냐 아니냐를 따지던 사람들 사이에서 '다른 데 쓰던 대나무 바가지를 주워 와서 써 봤다' 라고 할 수 있던 리큐는 분명 소박한 파격을 가지고 왔던 것이겠지요.



리큐는 당대에 엄청나게 멋진 다인이었기에 일본 다도계를 평정했습니다. 그가 했던 멋진 업적이 얼마나 많은지, 리큐가 종종 했던 '원래 그 용도로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쓰임새여서, 어울리는 부분을 발견해 기물을 전용(轉用)하는 일' 도 다도를 즐기는 방법의 하나로 책에 쓰여 있지요.




문화의 멋은, 그러나 작법에 있지 않습니다. 국밥을 담아 먹던 막사발을 고상한 다실로 들여 오는 아이디어도, 원래는 나뭇잎이며 주변에 떨어진 것을 깨끗하게 치워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쓰쿠바이(蹲踞; 다실에 들어오기 전에 손을 씻는 곳)이지만 눈이 내리는 날의 정취를 위해 일부러 테두리에 눈이 쌓인 그대로 두었다는 일화도, 다실에 들어가서 우아하게 절하는 법이나 걷는 법 그 어느 것도 멋의 본질은 아닙니다.


문화의 가치는 '지금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기쁨, 의미, 새로움을 주는가?' 라는 질문에 걸려 있습니다. 최고의 문화는 시의성을 가진 문화입니다. 그 어떤 전통보다도, 전통 속 사람들은 이제 과거의 기록으로서 반추되기만 하며, 실제 문화는 지금 이 순간 그것을 행하고 누리는 사람들에 의해서 피어나기에, 지금 문화를 누리는 사람이 우위에 있습니다. 오백 년 전 차의 성인(聖人)보다도 지금 차 한 잔을 마셔 보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센 리큐가 15세기 일본에서 최고였던 이유는 '15세기 일본 귀족 사회의 차' 에서 의미 있는 기쁨과 새로움을 최고로 잘 만들어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인에게 최고의 차 문화는 현대인에게 시의 적절한 차 문화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15세기를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지요.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사실 15세기를 완벽히 똑같이 한다고 해도 이미 그 다도가 우리 안에서 갖는 의미는 변화했습니다. 다도는 더 이상 서민의 소박함이 아니고, 쓸쓸하고 궁핍한 느낌에서 오는 사비(寂)도 아니며, 오히려 방 한 칸을 다실로 쓸 수 있는 여유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센 리큐는 와비차라 말해지는 자신의 차 세계를, 다음과 같은 고전 시가를 들어 비유하였습니다.


건너다 보면 봄의 벚꽃도 가을의 단풍도 보이지 않고
그저 바닷가의 뜸집만이 보이는 가을의 저녁 무렵


'벚꽃' 이나 '단풍' 은 당대 귀족들이 즐기던 화려한 차를 비유합니다. '뜸집' 은 그에 비해 소박하고 쓸쓸한, 가난한 어부의 집이지요. 그런데 리큐가 이렇게 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시대 차가 분명하게도 귀족 문화였기 때문에, 즉 차를 즐기는 사람들이란 다들 '벚꽃' 이며 '단풍' 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남방록 연구> 에서 이 대목의 해제를 보면,


'꽃과 단풍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은 애초부터 가난한 어부의 소박한 뜸집에 머물 때 느끼는 정취를 알 수 없다. 이러한 정취를 충분히 깨달아 즐길 수 있는 사람만이 뜸집이 지닌 한적한 와비의 경지를 알고 볼 수 있게 된다.

(…) 소박한 공간에서 얻을 수 있는 정신적인 만족을 추구할 때에 세속적이지 않은, 새로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처음부터 뜸집에서만 살아온 사람, 즉 일상에 쪼들려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풍류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 즐거움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시대에 어부는 다도를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부든 농부든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다도를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차 문화가 진정 대중을 상대로 발을 넓혀 가고자 한다면 그런 누구나 할 수 있는 다도를 찾아 나가야만 합니다.


그런 다도를 찾아간다면 세속도 소박함도, 와비도 사비도, 문헌 속 모든 말들은 지금 이 시대에 다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엇은 소박하고 무엇은 조촐합니까? 어떤 물리적 조건을 갖춰야 하는 이유, 작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조건과 방식이 기반하는 가치에 바탕을 둘 텐데 500년 전과 지금의 소박함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21세기, 차 문화의 주체는 바로 내가 되었습니다. 옛것을 재현해도 이미 내가 현대 사회의 현대 맥락 속에 있기에 이전과 같을 수 없으며, 지금 이 순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전통의 작법보다 가치 있는, 고유한 다도입니다.


<세상에 없었던 말차 입문> 은 그래서 이 시대 말차에 입문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제목입니다. 그 누구의 입문도 책 속 입문법이나 타인의 입문과 같지 않고, 그 모든 입문의 공통점은 오직 차라는 점 하나이기에.


모든 분들의, 이 세상에 없었던 차문화를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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