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가 보낸 초대장(#톨스토이 #첫인상 #도덕경)

by 혜인

러시아에서 편지 한 통이 왔다. 청첩장처럼 생겼기에 지인 중 누가 국제결혼을 하는 걸까 하며 봉투를 열었다. 러시아어 밑에 서툴지만 힘 있는 필체로 한글로 번역까지 정성껏 한 초대장엔 톨스토이가 자신이 최근 설립한 포스레드니크 출판사에 나를 초대한다고 쓰여 있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고 보낸 나의 편지에 답장을 주리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무려 초대장을 보내주다니. 나는 당장 이번주 금요일에 출발하는 러시아행 티켓을 끊었다.


나는 한눈에 톨스토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미간 사이에 완전히 자리 잡은 주름은 그의 진지하고 완고한 성격을 보여주었고, 그의 근엄해 보이기도 하고 강렬하기도 한 시선에서 자신의 책을 읽고 편지를 보낸 30대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바로 찾을 수 있었듯이 그도 나를 금방 발견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았나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곳에서 나만 흑발에 수수한 차림으로, 몸집보다 큰 백팩을 멘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바로 악수를 청했는데 손에서 느껴지는 굳은살만큼 손 힘도 굳세었다.

출판사로 향하는 길에 그는 자신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있는지 먼저 물었다. 사실 나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바보 이반'이라는 작품 외에는 아직 읽어본 적 없다고 솔직히 답했다. 그러자 그는 두 작품 모두 러시아 민화와 기독교적 정서를 기반에 두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혹시 믿고 있는 종교가 있는지 물었다. 당시 나는 솔직하게 믿는 종교는 따로 없으나 신은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 대답에 흥미로워했다. 나는 어떤 교리에도 신을 다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신이 인간을 통해 종교 세력 안에 자리 잡은 순간 그 종교집단 구성원 평균의 인격과 신격이 동일해지는 느낌이 싫다고 했다. 톨스토이는 깜짝 놀랐는데 사실 그도 러시아 정교의 타락을 나와 같은 이유로 비판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자신은 무리를 지어 세속화되거나 주변을 둘러보지 못한 채 권세를 누리려는 자들을 지독하게 미워한다는 것, 자신의 아내도 실은 지독한 현실주의자라 가끔은 섬뜩하다는 비밀까지 내게 들려주었다. 혹시나 타인의 가정에 손상의 빌미가 될까 봐서, 또 하루동안의 러시아 여행을 기분 좋게 보내고 싶어서 나는 그분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화제를 돌렸다. 꽤 긴 시간 이동하다 보니 그가 한때 도박에 빠져 전 재산을 탕진했다는 것, 이 오점이 자신이 극찬하는 뛰어난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와 유사한 것은 만족스럽다는 블랙 유머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도박으로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전했다. 그는 도박 빚을 지고 집까지 팔게 된 이후에 오히려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것에 대한 가치를 몸소 느꼈고 가난한 농민들, 사회적 약자들을 진심으로 위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출판사에 도착해서야 톨스토이가 나를 초대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출판사 서가에 꽂힌 책 한 권 덕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러시아 활자 속에서 눈에 띈 한자 다섯 글자가 있었는데 다행히 전부 내가 읽을 수 있는 한자인 '도덕경-노자'였다. 일 년 전 나도 음미하며 읽었던 책이라 톨스토이에게 이 책을 읽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독자들 중 굳이 먼 한국 땅에 사는 나를 초대한 이유가 바로 '도덕경'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자의 사상을 탐독하다가 동양 사상과 동양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대해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나도 노자의 사상에 대해 대화하면 흥미로울 것 같다고 전했더니 그는 우리가 외관상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만(사실 실제 나이도 많이 차이가 났을 텐데 말이다.)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향이 비슷한 친구나 다름없다며 웃었다. 그가 웃으니 진지하고 근엄했던 그의 표정은 갑자기 카리스마 넘치는 호인으로 변했다. 그는 자신의 두 단편 소설과 노자의 도덕경을 읽은 동양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1분 1초가 귀하다며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인 세몬이 미하일에게 내어줬던 크바스 한 잔과 빵을 주고서 일단 대화가 끝난 후에 성대한 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평소 존경하는 작가를 만난다는 들뜬 마음으로 간 여행이 인간에 대한 긴 토론의 장이 될 줄은 그때까지는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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