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도 다시 한 번

Part 2. 스물~스물 아홉: 노잼 라이프 청산기 9

by hyeinee

결재 승인도 떨어지지 않은 제안서에 맞춰 액션 플랜까지 짜서 뛰어다니느라 바쁜 딸을 보면서 엄마 아빠도 마음이 바쁘셨나보다. 매일 퇴근하고 집을 보러 다니느라 늦게 들어오는 나를 붙들고 엄마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 그래서 진짜 독립을 한다고?


아빠는 엄마의 입을 빌려서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 그래서 진짜 집을 알아보고 있다고?


몇 번을 물어도 바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부모님도 점점 마음을 비우는 눈치셨다. 결국 엄마가 먼저 두 손을 들어주었다.


- 어휴, 진짜 이 최씨고 저 최씨고 최씨들은 다 꼴 보기 싫어 죽겠어! 최씨 고집을 누가 말려. 네가 보러 다니는 집, 엄마도 같이 보자.


아싸. 한 클라이언트가 넘어왔다. 여기저기 널어둔 프로젝트 제안서가 쓸모없지 않았나보다.


다행히 내가 점찍어둔 매물이 엄마 마음에도 들었던 모양이다. 집을 보고 온 다음부터 매일 택배 박스가 도착하는 걸 보면 말이다. 꼴도 보기 싫은 최씨 딸이지만 손바닥으로 생쌀만 먹게 할 수 없는 엄마 마음이 그릇이 되고 냄비가 되어 집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고 왔다고 선포한 다음 날, 엄마는 아빠와 같이 이불을 사러 가자고 했다. 내가 예쁜 색 이불을 카트에 담으면 "넌 비염이어서 알러지 케어 이불을 써야 한다"고 엄마가 냅다 빼버렸다. 두 여자가 이불을 넣고 빼고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슥 사라진 아빠는 다시 돌아와 카트에 무언가를 툭 던져 넣었다. 메모리폼 베개. 베개는 좋은 걸로 써야 피곤하지 않다며. 무심한 듯 묵직한 아빠의 마음이 카트에 툭 던져졌다.


아직 발주를 넣지 않은 프로젝트를 갑자기 들고 와서, 게다가 예산안도 다 짰으니 이대로 진행하겠다는 막무가내 제안을 두 클라이언트는 못 이기는 척 결재 승인해주었다. 늘 그랬듯이, 미워도 다시 한 번.


필요한 짐을 장만하고 이사를 나가는 날까지도 부모님은 '미워' 모드와 '다시 한 번' 모드를 오락가락 하셨다.


- 뉴스 좀 봐! 혼자 사는 여자 집에 남자가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잖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어딜 나간다고 그래!


앗! 술 취한 남성이 혼자 사는 여성의 오피스텔 건물에 침입하려 했다는 뉴스가 나온 날은 '미워' 모드 ON.


- 너 이사 가서 쓸 청소기도 사야 하지 않니?


출근길 카톡으로 엄마에게서 청소기 핫딜 링크가 날아온 오늘은 '다시 한 번' 모드.


그 후에도 양쪽 모드 줄타기를 수십 번. 언제나처럼 미워도 다시 한 번 제안서를 뒤적이게 하는. 엄마 말대로 나는 못 말리는 큰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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