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인 Aug 28. 2023

유치하고 달달한 노랫말

멜로디보다 가사에 집중하는 사람의 음악에 관한 생각


노래를 즐겨 듣는 편은 아니지만 운전을 시작하고 나서 졸지 않기 위해 다시 노래를 찾게 되었다.


어떤 음악이 즉각적으로 내 맘을 사로잡는다면 그건 분명 도입부의 충격적인 멜로디나 리듬 때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내 마음속 한자리를 차지하는 노래들은 가사가 좋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가사에 집중하며 음악을 감상하는 편이다 보니 가사의 전개가 말도 안 되는 경우를  발견하게 되는 일도 잦고, 나중엔 자꾸만 가사가 거슬려 더는 듣지 않게 된 노래들도 있다. 그래서 직접 노랫말을 쓰는 가수들을 좋아하고 (대부분 밴드), 노래가 너무 좋았는데 작사가를 따로 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내 흥미가 좀 떨어지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가사는 세밀한 감정을 뾰족하게 잘 짚어낸 것. 사랑을 막 시작하는 설렘을 담은 노랫말, 사랑의 클라이맥스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노랫말을 좋아한다. 생애 가장 대중음악을 즐겨 듣던 시기가 딱 고등학생 때부터 스물, 스물하나 정도여서일까. 수준이 거기에 머물러있는 듯.


반면 절절한 이별 노래는 더 이상 기혼인 나로선 공감하기 어렵기에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담담한 이별 노래는 또 나쁘지 않다. 드물게 사랑을 다루지 않은 노래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잘 없다.


여름이 되자마자 달달하고 유치한 사랑 노래가 생각났다. 문득 신기해졌다. 딱 그 나이 대에 맞는 노래를 쓰고 부르는 이들도 있지만, 30대, 40대, 50대가 되어도 비슷한 사랑 노래를 계속 만드는 가수들도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길러도 어떻게 계속 비슷한 20대 초반의 감성을 유지하는 걸까.


가사 속 주인공이 모두 현재 배우자는 아닐 텐데. 과거의 경험을 불러와 쓰는 것일까, 상상력을 발휘해 쓰는 것일까? 두 경우 모두 현 배우자 입장에서는 크게 달갑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아티스트, 그리고 아티스트와 함께 사는 이들에게는 이런 것쯤은 쿨하게 감수할 수 있는 영역이려나.


내 마음에 남아있는 노랫말들을 몇 가지 모아봤다. 정말 모두 딱 20대 초반까지 듣던 노래다. 아직도 따라 부르면 설레는 가사들.


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게
브로콜리 너마저 <유자차>
오랜만테 학교에서 후식으로 나온 귤
아니 벌써 귤이 나오다니
얼굴이 스치는 바람이 차졌다
생각은 했지만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을 줄 일이야
재주소년 <귤>
낯익은 거리들이 거울처럼 반짝여도
네가 건네주는 커피 위에 살얼음이 떠도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바닷속의 모래까지 녹일 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
검정치마 <Antifreeze>


꽤나 조그마한 어쩜 한심할 정도로 볼 품 없는 그저 그런 누추한
하지만 너의 따뜻함이 나를 스치던 네 평 남짓한 공간에서 조용한 웃음과 시선,
슬픔을 건네주며 당신은 내게 물었죠 "지금 무슨 생각해"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단 생각해
현실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너무 완벽해
그래서 제발 내일 따윈 없었으면 좋겠단 생각하고
역시 만나질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그런 생각 해

너의 손끝에 닿은 나의 초라한 불안함 들은 온통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난 춤을 추죠 너의 눈 속에서
넬 <섬>


작가의 이전글 무라카미하루키<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