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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네 Oct 01. 2024

내가 사는 여기에 '더 가까이'

창고살롱 시즌 7 <나의 사적인 도시 생활기> 2회 차 후기


지난 8월 <나의 사적인 도시 생활기>라는 주제로 이주를 경험한 기혼 여성의 소모임을 진행했습니다.  자발적 '이주'가 아닌 배우자와 아이 교육으로 낯선 도시에 둥지를 틀고 살아야 하는 그들의 일상 이야기를 들으며 '이주'의 긍정적인 단어 어감을 찾고 싶었습니다.


레퍼런서의 일상으로 초대장을 받기 전,  우선 제가 이주를 하게 된 동기와 경과를 살펴봤어요. 감사하게도

 브런치와 블로그, 인스타그램 통해 애정하는 동네 공간들을 꾸준히 기록했는데요. 혼자 브런치,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 디지털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저만의 아카이빙 채널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 채널이 없었더라면 누군가에게 전하는 제 이야기가 신뢰를 주기 어려웠겠죠.


타인이 언급한 그럴싸한 도시 이야기가 아닌 진실로. 그곳에 거주하는 지역민으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이야기를 함께 해보고 싶어 2회 차 모임으로 기획했습니다. 로컬크리에이터가 전하는 우리 동네, 나의 도시에 살게 된 이유를 공유하며 매일을 살아가는 이 도시에서의 행복을 함께 찾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이 동했을까요? 레퍼런서로 참여해 주신 분들의 이야기가 서로에게 큰 영감뿐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희망을 전해주었습니다.



새 도시에 이주하며 꾸준히 적었던 브런치의 기록들(2016~)



다시 바라보는 긍정의 '이주'


1회 차 소모임에선 레퍼런서들의 자기소개를 통해 '현재 사는 도시에 사는 이유'에 대해 살펴봤어요.(마침 저는 1회 차 시간에 일주일간 친정에 머물러서 8년간 살아온 세종시를 떨어져서 생각해 볼 수 있었네요.) 막상 혼자 생각해 보면 그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개별의 상황에 맞춰 내가 사는 도시와 나라는 사람을 소개하기까지. 입밖의 단어로 각자의 단면을 소개하다 보니 서울을 비롯 포항과 뮌헨, 토론토, 수원, 세종, 군산까지. 서로 다른 도시의 삶과 일상을 짧은 2시간 내 집중하며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깨달음의 하나, ‘이주’라는 단어가 기혼 여성에 꽤 부정적인 단어임을 체감했습니다. 아이들의 교육, 결혼 등 스스로가 택한 자발적인 ‘이주’가 아닌 가족으로 인해 예상 못한 인생의 한 챕터를 열어야만 하는 객지에서 삶. 듣다 보니 그 단어의 긍정 의미를 찾고 싶어졌어요. '이주'의 명확한 의미가 자연스레 궁금해졌습니다.



이주(移住). 명사

1.       본래 살던 집에서 다른 집으로 거처를 옮김.
2.       개인이나 종족, 민족 따위의 집단이 본래 살던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정착함.                           여러 민족의 이주나 정복은 문화의 교류를 촉진하였다.               
3.       동물 외계의 상황에 적응하기 위하여 이제껏 살던 곳과 같은 자연적인 환경을 찾아서 옮겨 사는 일. 제비ㆍ기러기 따위가 철을 따라 사는 곳을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을 이른다.


나의 사적인 이유가 아닌  배우자의 일터, 아이들의 교육 등 가족의 안전지대를 위해 찾은 낯선 도시에서 각자가 마음을 주는 공간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1회 차 모임이 끝난 후, 저는 참여자들에게 ‘햇님’이란 호칭을 붙여주었어요. 지역에서 매일 뜨는 일출을 바라보는 분들인지라, 저를 세종햇님이라 먼저 불러줬어요. 뮌헨 근처에 사시는 뮌헨햇님 민경님, 포항햇님 봉화님, 수원햇님 새은 님, 토론토 지안 님(순서는 자기소개 때 언급한 대로), 그리고 창고살롱지기 대치햇님 혜영 님, 1회 차 줄 때 못 오셨지만 함께하게 되신 군산햇님 승희님까지. 각자의 일상에서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고 싶어졌어요.


제 마음이 통했을까요. 차차 햇님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애정하는 공간 사진들을 모으고 그곳의 이야기를 개인 SNS 통해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퇴사 후 자주 일터로 삼는 세종국립도서관뿐만 아니라 최근에 필사모임을 기획했던 세종 베이커리 카페 마이꼼빠뉴, 세종 이주한 후 종종 홀로 데이트를 즐기거나 세종을 처음 찾는 지인들과 방문한 카페비일상에 대한 기록물을 공유했어요. 이 글을 쓰며 저는 왜 세종에 거주하게 된 동기뿐만 아니라, '출근'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어요.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한, 덩어리시간 갖기


누군가는 평생 고향에 머무를 수도 있겠지만, 한 번쯤 태어나고 자란 동네를 떠나게 되면, 타지에서의 삶에 대해 기록해 볼 이유가 생기게 되죠. 이번 <나의 사적인 도시 생활기>를 통해 다시금 깨달으며, 평생 머물지 않은 도시이기에 나의 시선으로 기억할 공간을 내 방식대로 기록하며 현재, 미래를 살아갈 명분을 만들어드리고 싶었어요. 시간 - 공간 - 관계의 기록 통해 내가 거친 시대, 장소, 인물들을 되새기며. 내가 머물 미래 공간에 대한 바람을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할 때 홀로 두는 시간을 못 참는 경우도 생깁니다. 낯선 도시에서 애정하는 공간이 생기려면 충분히, 그 공간을 탐색하고 혼자 즐길 시간이 필요한데요. 저는 '덩어리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홀로 찬찬히 둘러볼 수 있는 공간으로, 되도록 주말 아침(오전 8시~12시 내)에 가져보길 권했습니다. 일하며 육아하며 가족의 품에 꼭 붙어있는 시간 외 일주일에 최소 4시간은 나를 위한 덩어리 시간을 가져야만 일상의 긍정감을 가져갈 수 있죠.


 2회 차 시간은 1회 차 온라인 줌모임 이후, 불과 일주일 뒤의 만남이었지만 금세 햇님들은 서로의 지역과 동네를 알아가며 라포가 형성되었어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싶어 오픈채팅방도 개설했답니다. 각자 처한 삶의 방향은 다르더라도 토닥일 수 있는 든든한 글쓰기 연대가 생겨 기쁩니다.


"내가 마음에 품고 있던 것을 포항이라는 공간과 함께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나와의 대화로,  갖고 있던 크고  작은 고민들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이번 소네 님의 소모임 ‘콘텐츠 만들기_ 나만의 사적인 도시 생활기‘를 통해 그동안 간간히 추천도 받기도 하고 나도 기록하지 않으면 어쩌면 놓쳐버리고 잊힐 것 같아 쓰고 싶었던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좋은 레퍼런서님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이야기들이 자극이 되고 길잡이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작게 시작해 보고자 새로운 계정도 만들고… 암튼 시작이 반임을 믿고 써보기로"
“각자의 도시에서 오늘도 멋진 하루를 보내고 계실 햇님들이 생각나 공유드립니다”
 “소네 님 덕분에 저도 1년 만에 정리해 보았습니다. 정리해 볼 좋은 기회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첫 이야기 너무 잘 읽었어요”
 “안녕하세요~ 제 이야기를 인스타 새 계정을 통해 쓰기 시작했습니다"
 "소네 님 공유해 주신 북페어 왔는데 사람이 어마어마하네요"
“앞으로 많은 이야기 기대해 봅니다” 등등..


참여하신 분들의 피드백을 통해 모두 잠시 머물었던 도시, 혹은 떠날 도시에서의 새로운 일상을 기록하고

자신의 삶을 되새길 수 있는 날을 매번 기록해 두기. 그 시간을 아끼며 애정하도록 앞으로도 저 또한 더 많은 곳에서 그 이야기를 찾고 담아보겠습니다.  끝으로 햇님들이 쓰신 '나만의 사적인 도시 생활기'도 덧붙입니다. 이번 소모임을 통해 인스타그램에 새로운 계정을 만든 2분이 계셔요. 아래와 같이 공유하며.. #나만의사적인도시생활기 함께하고 싶다면 댓글로도 응답해 주세요!




1. 포항햇님 봉화 님의 기록

: 나만의 아지트에서 홀로 일하지만 충만한 시간


태풍 '신신'의 위력이 곳곳에서 느껴지지만 오늘은 오도항의 '카페 검디'로 출근을 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두 어개의 등대를 지나면 2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바다뷰가 아름다운 곳. 2년 전 포항에 이사 왔을 때 우연히 발견한 보물 같은 카페다. 처음 방문 했을 때 입천정이 다 까지는 줄도 모르고 '잠봉뵈르'를 순식간에 먹어버린 기억을 인연으로 조용히 바다가 보고 싶거나 차분히 방해받지 않고 일하고 싶을 때 방문하는 곳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2층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첫 손님. 적당한 볼륨의  음악소리와 함께 주문한 잠봉뵈르와 아이스 라테를 높은 파도를 바라보며 찬찬히 먹었다. 태풍의 영향으로 오늘은 유난히 파도가 높아 바닷물이 튄다는 사장님의 권유로 주차도 방파제 앞이 아닌 건물 벽 쪽으로 해두었다. 다이내믹한 파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늘의 주요 업무는 '고봉화제작소'에서 새로 개발 중인 두 번째 건기식 Vitalite + 콘셉트 구상을 마무리하는 날인데 일인 기업인 나는 주로 남편이나 Chat GPT 그리고 인터넷 서핑을 통해 자료나 의견을 얻는다. 공장 담당자와 원료 수급여부, 원산지 등 상품의 굵직한 DNA가 결정되는 아주 중요한 단계다. 첫 번째 상품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더 공들이며 뭉그적 거리게 된다. 크고 작은 사업에서 의사결정이라는 건, 장단점을 파악해 선택을 하는 경우가 드물어 보인다. 결국 결단이다. 업의 본질을 명확히 해두면 마케팅 포인트를 발라내기도 쉽고 제품 콘셉트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쉽지 않은 걸 보니 아직 나는 업의 본질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도 같다.


날이 습해서인지 잠봉뵈르가 평소와 달리 바삭함이 덜하다. 입천정이 덜 아프다는 것에 '러키빅키'를 되뇌며 싱싱한 루꼴라와 두툼한 버터 그리고 유자와 오렌지의 중간쯤인듯한 잼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느긋하게 먹는다. 느긋한 식사처럼 오늘의 업무는 노트북 없이 손글씨로 해본다. 뇌의 속도를 손이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손으로 글씨를 써가며 업무를 해나가면 왠지 더 깊이 생각하게 되는 느낌이라 가끔 진도가 안 나갈 때 그렇게 하고 있다.


서울에서 줄곧 살았던 나는 지방살이가 아무래도 외롭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이사를 한 터라 남편과도 주말부부 신세가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함께 왔던(나의 아지트로 초대했던)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 있어 혼자와도 늘 마음이 푸근하달까? 오늘도 업무 잘 보고, 맛있게 식사도 하고, 파도 구경도 실컷 하고, 이만 퇴근합니다 :)


포항 '카페 검디'로 출근하여 자신만의 덩어리 시간을 가진 봉화님



2. 군산햇님 승희 님의 기록

: 예상치 못한 거주지에서 능숙한 드라이버가 되기까지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학교, 직장까지 다니며 30년 넘게 이 도시에서 살았다. 나에게 서울은 늘 내 곁을 맴도는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던 내가 서울을 떠나 전라북도 군산이라는 생경한 도시에 온 지 5년 차다. 서울을 벗어날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은 탓일까? 나는 군산이라는 지역이 한반도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군산에 온 이유는 치과의사인 남편이 8년 전 이곳에 개원했기 때문이다. 늘 지역(경북 영주, 경기 안양, 전북 군산)에 머물던 남편과 늘 서울에서 공부하고 일했던 나는 7년 장거리 연애 끝에 결혼했다. 주말부부 생활을 1년 넘게 이어가던 중 갑자기 아이가 생겼고, 팬데믹이 겹치면서 군산에 내려와 출산과 육아를 하기로 결정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대면 업무가 가능해 만삭 때까지 일했고, 육아휴직 1년 후 복직해 다시 1년을 온라인으로 일했다. 워킹맘으로 일하면서 몸이 약한 아이가 입원을 반복했다. 우리 가족을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결국 내가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업주부'라는 이름으로 산지 1년 2개월째, 아직도 이 수식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불시착한 이 도시 군산에서도 여전히 표류 중이다.


서울에 살면서 차를 몰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다. 어딜 가든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22살 때 따놓은 운전면허는 그렇게 장롱에 처박혔다. 그런데 군산에 오면서 가장 불편한 게 '이동성'이었다. 지하철은 없었고, 버스는 배차간격이 매우 넓고 심지어 부정확했다. 매번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고역(주로 택시기사 이슈)이었다. 장롱에 처박아둔 운전면허를 꺼낼 때가 왔다.


이 도시에 살면서 제일 좋은 점은 나를 '드라이버'로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연애 때부터 남편이 끌던 하얀색 SUV가 내 첫 차가 됐다. 심각한 길치에 방향감각도 나쁜 나도 운전을 하게 됐다. 인구 25만의 도시 군산은 교통체증도 없고 주차난도 적은 편이다. 핸들을 잡고 벌벌 떨던 나는 이제 뒤에 아이를 혼자 태우고도 운전하는 멋쟁이가 됐다.


군산에서 좋아하는 단골집 중 하나는 '음미당'이라는 브런치 식당이다. (한 달에 3-4번 정도 가지만, 나를 아는 척하는 사람은 없다) 대표 메뉴인 브런치에 걸맞게 영업시간이 새벽 7시부터 오후 3시까지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요가를 한 뒤 이곳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며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주로 앉는 자리도 정해져 있는데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다. "Life is better (sometimes) when you're alone)"

너무 공감 가고 나한테 적절한 문장이라 사진으로 찍어 간직해 뒀다.  


식당이든 카페든 단골집 사장님이 아는 척을 하면 E는 "나를 알아보시네^^ 앞으로 더 자주 와야지"

I는 "나를 알아보다니ㅜㅜ 당분간 오지 말아야지"라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극 I인 나는 후자 쪽에 가깝다. 아무리 좋아하는 단골집이라도 사장이든 점원이든 나를 아는 척하는 게 몹시 부끄럽다.. 설령 나를 알아봤을지라도 그저 100명의 손님 중 1명으로 대해줬으면 좋겠다.


추천해드린 '군산북페어'1회를 다녀오신 승희님, 앞으로도 군산의 곳곳을 탐험해주실.


3. 대치햇님 혜영 님의 기록

: 지속가능한 일과 삶을 지키기 위한 최선


첫째가 중2, 둘째가 초6일 때 예상치 못한 신랑의 해외 주재 발령이 있었다. 코로나 시기, 갑자기 출국해 2년을 보내고 돌아올 즈음 첫째는 고1, 둘째는 중2였다. 입시가 코앞인 첫째는 한국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다는 마음을 고집했다. 귀국이 가까워질수록 고민이 많았다. 우리 집(송파)으로 돌아가면 나는 다시 이전처럼 아이의 학원 라이드를 해야 하는 일상에 메여버릴 것 같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두 아이의 학원 스케줄은 제각각일 것이며 나의 오후는 운전과 주차로 점철될게 뻔했다.


처음 내 인생에 학원 라이드는 첫째가 초3 때 주 1회 CMS(사고력 수학 학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고작 5km 내외 거리를 운전하는 게 그리 큰일이 되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하교 후 학원 수업이 시작되는 4 ~ 6시 사이 저녁 시간 대치동 주변은 그야말로 매일매일이 극심한 교통 정체가 기본값이다. 평소 10분 이내면 갈 수 있는 거리도 금세 30분 이상으로 내비게이션 맵이 온통 빨갛게 바뀌고 도착 예상 시간은 자꾸 늦어진다. 학원 수업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내 속은 바짝바짝 타고 부주의하게 서둘다 보면 접촉사고가 나기도 한다. 학원 주변 유료 주차장은 주차비가 과하게 비싸고 그나마 주차할 공간도 거의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2시간 정도 수업이 진행되니 집에 다녀오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다. 무엇보다 다시 일을 시작한 내가 주중 오후 시간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코로나 시기에 중학교에 입학하고, 엘리트 운동부(농구) 생활로 학습 공백이 아주 큰 첫째는 고등학교 1학년 2학기에 완전 노베에서 입시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입시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어차피 선택의 폭이 넓고 효율이 좋은 사교육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막내딸 둘째도 이제 ‘학습'을 제대로 시작해야 할 테다. 그렇게 귀국을 몇 달 앞두고 급하게 대치동으로의 이사를 준비했다. 모든 과정이 매우 촉박하게 진행됐다. 여름방학 시기라 전세 물건도 많지 않았다. 사진으로만 집을 보고 계약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 마음에 드는 집이 없어 애가 탔다.


귀국일은 점점 다가오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시점에 다다를 즈음 부동산의 설득과 데드라인의 압박으로 가능한 옵션 중 최선이라 생각되는 집으로 눈을 질끈 감고 정해버렸다. 단지 양 옆으로 3호선 지하철역이 두 개나 가깝게 있고 양재천도 단지 바로 앞이라 장점이 많은 아파트 단지라고 했지만 이곳은 40년이 넘은 복도식 아파트였다. 아무리 최근에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관리도 매우 잘된 드문 물건이라 소개받은 집이지만 내 집 같은 안락함과 편안함은 없었다.


어느덧 귀국한 지 1년이 지났다.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난 ‘운전은 절대 하지 않으리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중이다. 서울로 돌아오면서 이예 차를 구입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걷거나 버스를 타고 등하교한다. 집에서 한 두 블록 내에 위치한 학원은 모두 걷거나 버스 1~2 정거장 이내이다. 사실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은 공유 전기 자전거인데 좀 비싸다. 나도 전기자전거를 애용하는데 최근엔 딸내미가 그 편리함을 알아버려서 큰일 났다. 버스 기다리는 시간, 버스정류장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세이브할 수 있지만 학원 등하원 시간에는 인도에 인파가 넘쳐 타기 어렵다.


신랑과 나는 지금의 생활을 대치동 유학 중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둘째 졸업 이후 어느 동네,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지 종종 서로 묻곤 한다. 나는 도서관이 가깝고 맛있는 커피가 있는 카페와 독립 서점과 베이커리가 있는 동네가 좋다. 그리고 공원과 그린그린이 많이 보이는 뷰를 집 안으로 들일 수 있는 곳에 살고 싶다. 아파트 또는 주차장뷰가 이렇게 스트레스일 줄이야! 탈대치를 꿈꾸며.


- 대치도서관

아주 오래된 은마상가 2층에 자리한 대치도서관은 이 동네에서 내가 가장 자주, 꾸준히 가는 곳이다. 그리 넓지 않은 오래된 공간에, 없는 책도 많은 구립도서관이지만 상관없다. 에어컨 잘 나오고 상호대출이 잘 되어 있어 원하는 책은 얼마든지 빌려 읽을 수 있다. 희망도서도 잘 사주는 편이다. 가끔 상호대출을 기한 내 대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사서분께서 양해를 해주셔서 도서관 오픈 전(9시)에 오면 대출을 허락해 주신다.

 

-스타벅스 (대치역 1번 출구 앞)

대치동 카페엔 자리가 없다. 블록마다 카페가 몇 개씩 있지만 거의 대부분 만석이다. 학원과 학원 사이 숙제나 공부를 하는 학생들과 아이들 라이드 후 대기하는 학부모로 자리 잡기가 쉽지 않다.  처음 대치동에 이사 와서 아이들이 7:30쯤 등교하고 나면 거의 동시에 함께 나도 나갔다. 집에 있으면 빨래, 설거지, 청소 등 계속 집안일이 눈에 보여 일을 해치우지 않더라도 일에 집중이 잘 안 됐다.


마음이 산란스러워져 QT책과 읽을 책 한 두 권을 챙겨 대치역 1번 출구 앞 스벅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 따사로운 햇살이 좋아 일부러 블라인드도 내리지 않고 광합성하는 느낌으로 앉아 몇 시간씩 책을 읽었다. 할 일이 머릿속에 떠올라 마음은 부담이 되는 날도 있었지만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일어나자마자 눈곱만 뗀 쌩얼에 잠옷에서 편안한 원피스나 운동복으로 휘릭 환복하고 5분 정도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스벅의 오전 시간이 날 살렸다.


혜영님이 담은 서울 대치동의 풍경. 유해시설이 없어 아이들의 등하교, 늦은 학원길까지 안전한 동네   


4. 토론토햇님 지안 님의 기록

: 매일 애정하는 '공원'에서 토론토 매력을 느끼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바로 “공원”입니다. 토론토 외곽지역은 물론이고 도심 한가운데에서도 언제든 갑자기 울창한 나무들이 즐비하고, 동네 친구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공원이 나타납니다. 토론토 시내에는 1500여 개의 시립공원이 있고, 모두 무료로 개방되며 잘 관리되어 있습니다. 규모와 시설은 제각각이지만, 기본적으로 나무와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그리고 여름에 뛰어놀 수 있는 물놀이장을 갖추고 있어서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


해마다 5월부터 10월까지 열리는 파머스마켓에서는 각종 베이커리, 과일, 엠파나다나 카레, 김치 같은 특색 있는 셀러들이 여러 가지 음식을 팔기도 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신만의 레시피로 팝시클을 얼려와서 파는 작은 트럭에서 밀크티라벤더(London Fog Lavender)를 사 먹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거나, 나무를 타거나,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나무집에 올라가서 멍하니 숲을 바라보기도 해요. 여름에 해가 늦게 질 때는 밤 아홉 시까지 놀아본 적도 있어요. 학교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공원에 모이고, 이곳에서는 하루에 적어도 7개 국어 이상의 말을 들을 수 있답니다! 다람쥐와 새를 잔뜩 볼 수 있는 동네 공원이 제가 이 도시에서 제일 자주 가는 곳입니다.



오늘도 아침을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새벽운동은 뇌도 깨어나게 해 주지먼, 하루를 잘 보내고 싶은 동기부여가 되는 좋은 활동인 것 같아요. 스타벅스에선 안 마셔본 음료를 마셔보자고 매일 다짐합니다. 오늘은 아이스드 피칸 크런치 오트 라테를 마셔봤는데 고소하니 좋았어요.


오늘은 주말에 있을 조촐한 파티를 위해서 “Party City”라는 파티용품점에 다녀왔어요. 파티에 진심인 문화 덕분인지 피냐타, 각종 초, 답례품(아이들 생일에는 간단한 간식과 장난감을 넣어서 구디백으로 답례를 한답니다. (영어로는 party treats) 같은 몰에서 초밥 all you can it(뷔페!)을 먹고 art and craft 제품 사는 곳에서 털실 구경을 실컷 했어요. 주변 어린이들 줄 선물을 만들려고 귀여운 털실 두 개도 샀고요.


오후엔 공원에 가서 오랜만에 친구와 parenting과 근황을 나누고 저녁노을 보면서 저녁 먹고 누워있습니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하루 속에 무엇을 챙기면 좋을지 한 번씩 생각해 보곤 합니다. 영어도 더 잘하고 싶고 글도 더 틈틈이 쓰고 싶은데 하루의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주말 전에 추석 음식 대비 겸 한국마트 갤러리아와 코스트코에서 장을 봤어요. 송편이랑 전 재료는 한국마트에서, 갈비는 코스트코에서 샀지요. 요즘은 한국음식 구하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어서 편해요. 젓갈류도 종류별로 다 있고요. 13년 전에 어학연수 왔을 땐 낙지젓갈이 너무 먹고 싶어서 한국마트 브랜치 별로 다 전화해 봤는데 들여오는 마트가 없었답니다. 지금은 마트별로 브랜드별로 없는 게 없어요. 송편도 색상도 예쁜데 맛도 좋았어요.


코스트코에서는 여름용품 물풍선과 크리스마스 제품들이 한 곳에 전시되어 있는 재미있는 풍경이었어요. 사진 속 펭귄장식을 살까 말까 고민 중이에요. 사실 1월부터 이스터 용품, 7월부터 핼러윈 용품, 9월부터 크리스마스 용품을 볼 수 있는 곳이 토론토예요. 다들 사는 게 너무 심심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런 날들에 진심이기 때문일까 생각해 봤는데 둘 다 맞습니다. 하하. 냉동고에 자리하고 있는 비비고 브랜드나 한국어로 쓰여있는 제품들(빼빼로, 밀키스, 새우볶음밥)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뿌듯해요!



8월 소모임 이후 계정을 만든 지안 님의 도시생활기. 벌써 31건의 이야기가 채워졌네요


5. 뮌헨햇님 민경 님의 기록

:  독일독문 전공자라도 낯선 독일, 낯선 사람


결혼한 지 몇 개월 후 나는 2000년 1월 3일 독일인 남편을 따라 고향인 서울을 떠나 뮌헨으로 이주했다. 남편의 회사에서 마련해 준 임시 아파트가 있었던 Lindwurmstrasse는 겨울은 그렇다 치더라도 3월이 되고 4월이 되도록 도로 양쪽으로 주욱 늘어서있는 시커멓게 높고 거대한 나무에 작고 파란 잎조차 나오지도 않는 그런 어두침침한 거리였다.


그때만 해도 평일에는 정육점과 제과점은 저녁 6시에, 슈퍼는 저녁 7시면 칼같이 문을 닫았고, 토요일에는 모든 상점이 1시에 문을 닫았으며(정육점과 제과점은 심지어 12시에 닫는다), 일요일은 레스토랑을 제외하고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다. 장보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기도 하지만 상가가 문을 닫고 나면 길거리가 너무나 어둡고 썰렁했다.


북적거리는 서울의 주말 거리를 상상하며 남편과 주말 저녁에 시내 중심으로 나가 보았지만 인적이 드물고 썰렁한 바람만 불고 도대체 여기서는 사람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나 아득하기만 했다. 가족과 친구들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퇴근하면 동료들과 주말엔 친구들과 저녁 먹고 술자리를 함께 했던 강남과 압구정의 거리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내가 도대체 무슨 삶을 선택한 걸까? 춥고 습하고 어두웠던 뮌헨, 그때의 나에겐 베를린인지 뮌헨인지 구별 없이 다 그냥 낯선 ‚독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친정 집에서 명절에도 평소에도 음식 준비하시는 엄마를 자주 도와 드리며 어깨너머로 보아 왔지만 아직까지도 혼자 직접 음식을 하는 게 서툴렀던 나는 머지않아 자주 한국 음식이 그리웠다. 한국 음식점 이라고는 슈바빙 북쪽에 어디 하나 있다고는 들었기에 어느 날 저녁 너무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 남편과 가보았다.


 하지만 곧 그 맛과 질에 일차 놀라고, 그 가격을 보고는 이차 삼차 놀라서 서투르지만 내가 집에서 음식을 해 먹는 게 맛도 가격으로도 훨씬 낫겠다 싶어 그 후로는 한국 음식점을 가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너무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을 때는 대학가 앞에 작은 분식점을 찾아가 희한한 재료들이 들어간 비빔밥이나, 짜기만 하던 김치찌개를 싼 맛에 사 먹으며 한국 음식에 대한 허기를 채우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낯설고 춥고 외롭고 한국 음식에 굶주리며 살았던 뮌헨이 나중에 나의 제2의 고향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비교적 긴 길이었지만 그래도 그 길을 조금이라도 짧게 단축시켜 준 키들 중에 하나는 언어, 그러니까 ’ 독어‘ 였다. 독어독문 전공에 영어영문 부전공 했으니 금방 마스터했을 거라고요?(노노노)

서러웠다 정말. 정말 어려웠다.


소모임을 통해 <나만의 사적인 도시 생활기> 기록을 위해 따로 계정을 만든 민경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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