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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네 Dec 21. 2020

오늘은 하원을 안 시킬게요

퇴근 후 육아하기 싫은 날

저녁 6시. 평소 퇴근 시간을 넘었다. 오후 5시만 넘어가도 입술이 마르고 마음이 초조한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하루를 넘겨 밤새어서 일에 매진하고 싶었다. 잠시 일에 빠져보니 30분 경과, 저녁 6시 30분.


“혹시 지금 저녁 신청하면 줄 수 있나요..”

“긴급 휴원으로 시간연장은 더 어렵습니다.”

“네... 데리러 갈게요.”


저녁 7시에 하원 시키는 경우도 많지 않거니와, 어린이집에서 저녁을 먹는 일은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였다. 나와 그가 야근을 동시에 해서 어쩔 수 없이 올해 한 번을 먹여봤을 뿐. 내 입에서 “저녁 먹여주세요”라고 어렵게 어린이집에 부탁할 일은 거의 없었다. 당연히 아이의 저녁은 집에서 같이 먹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겠다는 말과 달리 하던 업무를 계속했다. 벌써 시계는 7시를 가리킨다. 아이를 하원 시켜야 하는데 가지 못하고 있다. 정규 업무는 끝났는데, 그간 밀린 업무를 정리하느라 시간을 초과해버렸다. 마음만은 '지금' 퇴근하고 싶지 않았다. 밀린 일이든 원래 내가 손벌린 일을 마치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평소대로라면 자리에 없는 내가 자리를 예상치 못한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옆 남자 동료가 물어본다.


 “아이 데려가지 않아요? 아이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의 질문에 답을 얼버무리고, ‘아, 가야 하는데 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내 마음속의 답을 스스로에게 꺼냈다. 컴퓨터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전원을 꺼야 하는데, 마침 업데이트 팝업창이 뜬다... '퇴근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내 마음을 알아채버린 컴퓨터에 화풀이를 해버렸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아이는 해맑은 미소를 띠며 엄마를 반겨줬다. 아이를 데려오는데 계속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오늘은 엄마가 많이 늦었지.. 하루 종일 엄마 기다리느라 힘들었을 텐데, 기다려줘서 미안해. 빨리 저녁 먹으러 가자."


아이의 마음을 달래준다고 꺼낸 말이었지만, 나를 위로하는 말이기도 했다.

  



우리의 두뇌가 정확성이 아니라 효율성 위주로 기능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은 믿을 수가 없다. 너무 형편없어서 법정에서 목격자 증언이 증거로 채택되리라는 보장이 없을 정도다. 게다가 우리의 두뇌는 지독하게 편향된 방식으로 작동한다.

<신경끄기 기술>
'6장. 넌 틀렸어, 물론 나도 틀렸고' 발췌


편향한 방식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만 내 행동을 지배받고 싶을 때가 많다. 아주 많이. 어떻게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들만 하며 살 수 있을까. 밥벌이를 하는 이상 내가 해야 할 것들은 늘어가고, 아이를 키우는 이상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늘어난다. 그 중간에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은 할 엄두가 안 난다. 지극히 시간을 내야만 하고, 시간을 쪼개야 한다. 내 마음을 졸이고 졸여야만 내 시간을 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그 시간을 잘 쪼개고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내년에도 똑같은 고민을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퇴근을 하지 않고 계속 일하며, 육아를 하지 않을까. 결국엔 누군가의 손을 빌려 아이를 하원 시켜야 하고 저녁을 먹여야 하고. 내 저녁은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내 마음을 다독일 누구도 없다. 결국엔 모두 내 손안에 달렸다. 


퇴근하기 싫은 그런 날. 저녁을 먹지 않고도 계속 사무실에 붙어있고 싶은 그런 날. 내가 내 시간을 통제하고 싶은 그런 날. 자주 찾아오는 마음은 아니지만, 내 마음을 다독이기 위한 그런 날은 '퇴근 후 육아하기 싫은 날'이라고 명명을 하기로 했다. 내가 내 마음을 달래야만 제때 퇴근을 하고 아이를 하원 시키고 저녁을 먹일 수 있다.


내 저녁은? 뭐 없다. 저녁을 먹지 않는 상태로 그렇게 하루를 지나갈 때도 있다. 나를 챙겨야 내 주변인을 챙길 여력이 나는데 나를 위로하기 위한 팁은 무엇일까. 매일 아침마다 모닝리추얼을 더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을 꺼 같다. 도돌이표처럼 당분간은.. 출근 전 아침마다 내 시간을 내어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밖에...   



퇴근하기 싫은 그런 날.
저녁을 먹지 않고도 계속 사무실에 붙어있고
싶은 그런 날. 내가 내 시간을 통제하고 싶은
그런 날. 내 마음을 다독이기 위한 그런 날은
 '퇴근 후 육아하기 싫은 날'이라고
명명을 하기로 했다.


재택교육을 받은 날, 교육듣느라 아이를 혼자 두니 여기저기 형광펜으로 집안 곳곳을 낙서하다가 자기 몸에 낙서를 한 후 낮잠들여버렸다.. 어지러진 내 마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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