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가을을 떠나보내며
스무 살이 지나기 전, 원색을 참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잘 익은 사과의 새빨간색이 좋았다. 단풍잎의 적색 빛의 빨간색도 탐나는 색깔이었다. 그러나 정작 매일 입던 옷은 내 몸에 물들고 싶은 빨간빛의 사복이 아닌 '교복'이었다. 1년간 황토색의 멜빵바지, 6년간 자줏빛 치마 정장 교복, 남색 교복 치마와 남색 조끼와 재킷을 6년간 입었다. 유치원생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13년간 줄곧 교복만 입어야만 했다. 사복을 입을 기회는 일 년 중에 손에 꼽았다. 그나마 방학과 주말뿐.
원색의 외출복을 입은 날은 얼굴빛이 밝았다. 내 얼굴톤과 잘 맞는 색깔이라며 엄마가 골라주신 옷들만 입다 보니 빨간색 코트, 빨간색 재킷 등이 옷장을 가득 메웠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원색의 옷들로 사진 속 유년시절의 모습은 눈에 띄긴 했다. 여러 원색 중에는 노란색은 없었다. 노란색은 나와 맞지 않은 색이라 생각하기도 했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잘 타는 노르스름한 피부빛에 노란색 상의를 입은 내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쩌다 알게 된 퍼스널 컬러를 통해 나는 웜톤에 맞는 피부와 머리카락, 눈동자 색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봄과 가을로 구분되는 웜톤에 맞는 내 피부의 계절 색은 가을색이었다. 가끔 예외도 있나 보다. 내 피부색을 돋보이게 해 준 색깔의 옷을 살펴보면 흰색이 섞이지 않은 채도가 높은 원색, 겨울 쿨톤 색감이 더 잘 어울렸다. 퍼스널 컬러엔 분명 가을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가을을 대표하는 갈색, 황토색, 카키색은 나와 맞지 않았던. 그중 가을을 대표하는 은행잎의 노란색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년 가을을 떠올리면 은행잎을 자연스레 떠오르지만, 노란색의 은행잎에 정이 들지 않았던 건 무엇일까. 은행잎에 딸려온 고약한 은행 냄새가 한 몫했을까. 아니면 그 색 자체에 마음을 두지 않았던 건가. 생각해보면 노란 은행잎과의 추억이 많지 않았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매년 바닥에 떨어진 은행잎을 뒤로한 채 내 눈에 들어온 빨간 단풍잎만 모아 책 속에 넣어두곤 했다. 물기를 흠뻑 먹은 빨간 단풍잎을 간직하면 잠시나마 가을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거 같아서. 청명하고 드높은 가을 하늘이 좋아서 사계절 중 너무나 좋아했던 계절이지만.. 9,10,11월... 1년 중 12개월의 4분의 1도 채우지 못하고 2020년의 가을은 그리 짧게 지나갔다. 코로나 19로 외출을 자제했던 올해는 가을여행을 떠날 채비를 못했다.
그나마 짧은 가을의 여정에 남긴 사진첩을 들춰보면 노란색이 나를 반겨주었다. 아이와 주말에 모닝 리추얼을 통해 산책하며 주었던 은행잎, 모닝리추얼 글쓰기에 주로 썼던 좋아하는 캐릭터(스누피)가 그려진 노란색 펜, 올해 최고의 책으로 꼽고 싶은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의 샛노란 책 표지, 오랫동안 연을 이어온 대학교 때 친구와 평안한 대화를 나누며 마셨던 샹그리아 속의 레몬 껍질, 동료에게 선물 받았던 레몬 손뜨개 수세미, 매일 출근길에 스쳐봤던 나의 은행나무 '은친(은행 친구)'.
내 손과 입 안에 들어온 노란빛부터 눈에 비친 노란빛까지. 그토록 정이 가지 않았던 노란색의 역사를 오늘 아침신문에서 알게 되었다.
은행나무는 화석식물의 대표 격이다.
대략 3억 년 전엔 등장했다. 티라노사우루스로 상징되는 공룡이 지구 상에 등장하기 이전인 고생대 무렵이다. 지구과학 교과서에 빠지지 않는 삼엽충이 은행나무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생물이다. 삼엽충은 사라졌지만, 은행나무는 살아남았다. (중략)
세계적으로 은행나무가 자생하는 지역은 한국 중국 일본 정도다.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특유의 노란색 낙엽 때문이다. 독특한 색감은 사람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고 가로수로 간택돼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울특별시는 1971년 4월 3일 서울을 상징하는 나무로 은행나무로 지정했다. 화석식물이다 보니 웬만한 병충해를 가볍게 이겨내는 것도 장점이다.
_2020.11.9. 중앙일보 칼럼 ‘은행나무’ 중
아이가 좋아하는 티라노사우루스보다 더 기나긴 세월을 버틴 은행나무의 역사를 훑어보니 노란색은 영원불멸의 상징색이 아닐런지. 성별을 모르는 새 생명에게 노란빛으로 물든 배냇저고리나 바디슈트를 무심결에 늘 집었는데..성별에 구분 없이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입을 수 있는 싱그러움과 맑음. 노란색이 내게 부담스러웠던 그 이유는 그 맑음을 갖지 못한 나의 어두움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닐지.. 내 평생 좋아하지 않을 이 색은 혼자만의 기억할 추억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할 수 있는 색이 되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비록 내겐 어울리지 않아도 내 주변에 노란빛으로 물들 수 있는 선물의 색으로. 은행잎은 이제 그 자체로 내게 선물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기나긴 겨울을 이겨내고 만난.. 향기가 좋아서 매료된 프리지어 꽃도 노란색인데. 참 좋아하는 들꽃들도 노란색이 많았다. 꽃 중의 으뜸 색은 노란색이었을지도.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은 자연의 색이었던 노란색. 2020년의 노란빛으로 물든 가을을 잊어버릴 수 없겠지. 의미없었던 색의 추억이 생겼으니. 이토록 추억이 없었던 노란색의 여정에 2020년 가을이 출발점이 되었다. 또 그립고 또 그리워질 거 같다.
내 평생 좋아하지 않을 이 색은
혼자만의 기억할 추억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할 수 있는 색이 되었음을...
비록 내겐 어울리지 않아도 내 주변에 노란빛으로 물들 수 있는 선물의 색으로. 은행잎은 이제
그 자체로 내게 선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