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마냥 무의미하지 않은 가정들
고등학교 절친의 결혼식에 갔다가 뒤풀이로 카페에 가서 오랜만에 이야기꽃을 피웠다. 여러 명이 모이니 딱히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수다를 떨게 되었고 점차 아무 말 대잔치로 흘러갔다.
로또를 구입할 수 있는 나이부터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던 가정. 1등 되면 뭐 할 거야? 하다 보니 요즘 1등이 얼마인지부터 시작해서 10억 이하면 부동산을 사야 한다, 1억 이하면 벤츠를 사서 플렉스 하겠다는 둥 어차피 생기지도 않을 일 하면서 별소리를 다 떠들었다.
그중 새로운 주제는 과연 로또가 되면 어떤 사람들한테까지 당첨 사실을 밝힐 것인가? 였는데, 절친한테는 말해도 가족들과는 말하지 않는다. 직계한테만 말한다.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배우자 한테까지만 말한다 등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다.
어느 주말 서울로 가는 양재 IC 주변 경부고속도로에서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이곳은 늘 막혀서 거의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아서 심심함과 동시에 조수석에 앉은 사람과 토론하기 적합한 곳이다.)
"자기는 로또 되면 누구한테 까지 말할 거야? 나는 자기한테만 말하고 싶어. 부모님한테까지 말하면 우리 오빠한테 도와주라고 할 수도 있잖아? 아 그런데 가족인데 도와줄 수도 있나? 어렵네."
이런 말이 나온 이유인즉슨, 결혼식장 뒤풀이에서 이야기하다가 친구가 한 말 때문이었다. 자기 부모님이라면 남동생 집에 돈을 보태주라고 하실 것 같아 말하기 껄끄러울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절약하면서 경제 공부도 많이 하는 친구 입장에서는 단지 불로소득이라는 이유로 형제에게 돈을 건네주어야 한다는 것이 충분히 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자기가 장인 장모님이나 형님한테 돈을 드리면 나도 부모님이나 여동생한테 줘야 할 것 같고, 그러다 보면 아무것도 안 남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러고 보니 그렇네. 우리 모두의 부모님이나 형제들이 당장 사채 빚 못 갚아서 끌려갈 정도로 어려운 것도 아니고 특히 불로소득으로 생긴 돈이라도 하면 고마운 것도 모를지도 몰라. 나도 우리 오빠가 로또 1등 됐는데 나한테 뭐라도 안 주면 아쉬울 것 같기도 하고. 아,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느새 정체가 풀려 한남대교가 보이기 시작했고, 차는 점점 속도를 낼 수 있었고, 목적지를 향해 1,2차선으로 갈 것인지 3,4차선을 유지할 것인지가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엄숙하게 말했다.
"좋아, 일단 우리끼리만 알기로 하고 불로소득이라고 말하면서 도와주지는 말자."
이렇게 한남대교에 진입하자 로또 1등이 되면 가족들을 도와줄지 말지에 대한 대화는 끝이 났다.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동안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그저 농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배우자가 생기고 나니 달라졌다. 나의 인생은 나만의 것이 아닌 둘이서 고민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가끔 이런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미래에 닥칠 일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눠보면 정말 그 일 또는 비슷한 일에 직면했을 때 서로 놀라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부부가 된 후 로또를 산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건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