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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May 03. 2019

영감과 모방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그림책 NOW, 이응노, 루이즈 부르주아



[cabinet de collectionneur] 시리즈 소개글 읽기




예술가는 식인종이다. 우리는 다른 예술가들을 잡아먹고 우리의 일부로-뼈와 살로-소화해서 우리의 작품 속에 토해낸다.

- 시리 허스트베트,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는 한 여자>, 63쪽


# 이 이미지, 어디에서 봤더라? 


<그림책 NOW>라는 전시를 봤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나미콩쿠르,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BIB) 등 그림책 출판계에서 중요한 권위를 지니는 상의 수상작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전시였다. 기억하고 싶은 작가와 그림책을 여럿 알게 됐지만, 전시장을 빠져나온 뒤에도 계속 생각나는 작품은 하나였다.


포르투갈 작가 안드레 레트리아(André Letria)가 그림을 그리고, 그의 아버지이자 극작가, 시인, 저널리스트이기도 한 호세 호르헤 레트리아(José Jorge Letria)가 글을 쓴 <전쟁>이라는 책.


https://www.pato-logico.com/editora/livros/guerra


'그것은 팔도 없고, 다리도 없으며, 하물며 날개도 없다. 그것은 어머니 아버지도 없고, 집도 없으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아주 슬프고, 추악하며, 또 오래된 것이다. 이제껏 셀 수 없이 여러 차례 미쳐 날뛰었다. (...) 그것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없고, 가슴으로 시를 느끼지도 못한다. 하지만 달 표면의 구덩이들보다 커다란 상처는 만들 수 있다. (...)

호세 호르헤 레트리아는 이 시를 통해 전쟁이란 늘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슬며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전시장 벽에 붙어 있던 설명처럼 이 책은 전쟁을 숙주를 찾아다니는 일종의 전염병처럼 표현하고 있다. 검은 형체가 무언가를 향해 빠르게 이동하고, 그중 일부가 제복을 입은 한 남자의 집 창문을 너머 그에게로 다가선다. 거미떼들이 검은 형체를 보좌하듯 주위를 맴돌고, 그중 일부가 남자를 타고 올라가 그를 '전염'시킨다.


https://www.pato-logico.com/editora/livros/guerra


전염된 남자가 얼굴을 가리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책을 불태운다는 건 사유를 불태우는 것, 감정을 불태우는 것, 낭만을 불태우는 것, 희망을 불태우는 것, 대화를 불태우는 것. 강렬한 이미지 한 장이 불러일으킨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남자는 도시를 군수공장으로 채우고, 전투기와 병사들을 수없이 찍어낸다. 그렇게 먼 땅을 모두 불태우고, 그곳의 사람들은 나뒹군다. 폐허 위에서 다시 검은 형체와 거미떼들이 스멀댄다.




전시장에 원화와 책 이외에도 작가의 썸네일 스토리보드, 습작 스케치, 인터뷰 영상 등이 충실히 준비되어 있어서 흥미롭게 보았다. 보면서 계속 '아, 이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이미지가 있었는데...' 하며 다른 창작물의 이미지를 나도 모르게 떠올리게 되었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영화 <매트릭스>였다. <전쟁> 첫 부분, 검은 형체가 타깃을 향해 빠르게 이동하는 부분에서 유영하듯 움직이면서도 순식간에 멈추어 공격을 쏟아부었던 센티넬들의 유선형 몸체가 연상됐다.



제복 입은 남자에게로 다가가는 거미떼의 기다란 다리를 볼 때는 루이즈 부르주아의 거미 연작이 생각났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침략당한 땅의 사람들이 폭격을 맞아 나뒹구는 장면에서는 곧장 이응노의 '군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군상, India Ink on Korean Paper , 166x273 cm , 1983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니 내 안의 목소리가 두 개로 찢어져서 서로 토론하기 시작했다.


자아 1 : 뭐야, 다른 예술가 작업을 따라 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나쁘다는 거야?


자아 2 : 아니, 그런 의도가 아니야. 좋은 작업을 오랫동안 해 온 그림책 작가인데, 그의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겠어. 매트릭스나 루이즈 부르주아, 이응노 말고도 훨씬 많은 참고 이미지가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작가는 그림책을 만든 거잖아. 그림책은 이미지 한 장을 잘 그린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야. 직전 페이지 이미지가 남긴 잔상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지, 책장 넘길 때의 감정적 낙차를 어떻게 설계할지, 각 이미지 속 관찰자 시점을 얼마나 가깝고 멀게 설정할지... 그림책을 만들 때 고려하는 이런 리듬은 다른 장르에서는 누릴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기 때문에 <전쟁>은 독창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해. 누가 누구를 따라 했다고 말하려는 게 아냐. 그냥 내가 그런 연상을 했다는 거지. 매트릭스 속 가상 세계, 루이즈 부르주아의 설치 작업, 이응노의 수묵화 모두 워낙 강렬한 이미지들이잖아,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운.


자아 1 : 그런데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잖아. 뭘 보고 영감을 얻었다는 말. 영감이라는 개념이 꽤 자의적이지 않아? 시리 허스트베트 말처럼 예술가들은 맨날 다른 예술가의 창작물을 집어삼키는데, 어디까지가 영감을 얻은 거고, 어디서부터 따라쟁이가 되는 걸까?

 

자아 2 : 둘을 날카롭고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아마 어렵지 않을까? 좋은 작업을 보면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면서 '아, 나도 저런 걸 만들어보고 싶다' 생각할 때가 있잖아? 그렇게 외부에서 들어온 자극을 꼭꼭 씹어서 잘 소화시킨 다음에 자기 것으로 녹여내는 시간을 가져야겠지. 달뜬 마음에 소화도 제대로 시키지 않고 내뱉으면 그건 자기 게 아니겠지.


자아 1 : 소화가 됐는지 안 됐는지 어떻게 알아? 감상자나 독자는 알 방법이 없잖아. 이 창작자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자기화했는지 아니면 조금 쉽게 취했는지 말이야. 워낙 카피캣이 많은 시대라서 조금만 좋아 보이면 유사한 작업이 우르르 쏟아지는 것 알지?


자아 2 : 그렇게 손쉽게 취해서 만든 것들은 그 '얕음'을 결국 들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정말 충분히 소화해서 자기화했는지는 창작자 본인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할 때만 알 수 있겠지. 명치 저 깊숙한 곳에서 작게나마 쿡쿡 쑤셔대는 뭔가가 있다면 그건 소화가 덜 되었다는 뜻일 거야.


자아 1 : 근데 재밌지 않아? <전쟁> 속에서 거미는 전쟁을 상징하는 부정적 이미지인데, 루이즈 부르주아의 거미는 엄마, 여성, 지켜내는 힘 같은 걸 상징하잖아. 비슷하게 생긴 이미지가 정반대의 가치를 가리킨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자아 2 : 이응노 화백 '군상'도 마찬가지야. 이응노 화백은 오직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했어. 실제로 '군상' 속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거든. <전쟁>에서도 비슷하게 군중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흑백 평면 이미지를 볼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폭격 맞아 나뒹구는 사람들을 그렇게 표현했거든. 역시 표면적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두 이미지가 가리키는 건 정반대지.

 

둘의 대화는 전시장을 나오고 나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이어졌고, 덕분에 나는 메모장을 한 바닥 채울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보리 국어사전을 펼쳐 '영감'을 찾아보았다.


영감(靈感) : 예술작품이나 발명품을 만들 때 불현듯 떠오르는 좋은 생각.


불현듯 떠오른 좋은 생각이라니. 이날 전시장 나의 내면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을 아우르는 단어가 거기 있었다.




루이즈 부르주아는 당신을 당신의 내면의 숨겨진 낯선 장소로 데려갈 수 있다. 이것이 그녀의 재능이다. (…) 프로이트도 공간적 비유-고고학을 좋아했다. 파헤쳐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  
- 시리 허스트베트, <살다, 생각하다, 바라보다>, 304쪽



# 따라 할까 봐 걱정되지 않냐고요?


며칠 전부터 '매일 모든 작은 글감'이라는 제목 아래 맹렬하게 뭔가를 써대는 나를 향해 어떤 작가님께서 질문하셨다.


"작가님, 이렇게 정기적으로 글감을 올리면 누군가 보고 써버릴 수도 있잖아요? 걱정되지 않으세요?"


음, 걱정이 전혀 안 된다면 거짓말일 거다. 내가 이런저런 소재를 찾아내고 연결한 관점을 어떤 작가가 쏙 빼가서 글로 쓴 걸 실제 목격하기도 했으니까. 강연장에서 여러 번 반복해 받은 질문이 있기도 하고. 요약하자면 이런 식의 질문이다.

"제가 작가님 블로그의 오랜 독자인데요, 작가님이 <그림책 처방> 시리즈 하실 때는 분명히 비슷한 콘텐츠가 없었거든요. 근데 요즘 어딜 가나 그림책테라피가 있잖아요. 이런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술은 기본적으로 테라피적 속성을 지녔다. 무엇보다 창작자 본인을 해방시킨다. 경우에 따라 보는 사람 내면에서도 비슷한 해방이 벌어진다. 예술 작품에 치유적 힘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발명해 낸 것이 아니다. 그림책도 분명 예술의 하나여서 그림책 장르에 이미 내재된 속성이기에 필연적으로 탄생할 수 있는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그림책 처방'이라는 단어를 내가 조금 빨리 썼을 뿐이다.

중요한 건 그림책으로 테라피를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각 글에 담긴 사유의 깊이, 관점의 참신성, 표현의 정확성, 문장의 미학성 등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관점으로 그림책을 읽어내는 분들이 많아지면 업계가 북적북적해지고 그건 그림책 창작자들에게도 이로운 일이기 때문에 나는 이 현상이 오히려 반갑다. (라고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답했다. 물론 정체 모를 '자격증'을 발급해 준다느니 하면서 상업화되는 현상은 반갑지 않다.)


나의 오리지낼러티를 어떻게 각인시킬 것인가. 이것이 나의 고유하고도 독창적인 생각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남들에게 주지 시킬 것인가. 남들이 따라 하지 못하게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나는 이런 데에는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그렇게 경계하는 데에 에너지를 빼앗기고 싶지도 않다.


나부터도 식인종처럼 다른 예술가와 다른 작가들을 와구와구 집어삼키는데, 순수하게 아무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은 내 것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배움에 관하여>에서 읽은 "한 사람의 진정성에서는 냄새가 난다"는 강남순 선생님의 문장을 진심으로 믿는다. 좋아 보이는 것을 대충 따라 하면서 사는 사람에게서는 흥미로운 냄새가 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가진 깊이는 종국엔 발각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내가 진짜 신경 쓰고 집중해야 할 일은 내 깊이를 만드는 일이다. 진정으로 가슴 뛰고, 진정으로 감탄하고,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 신호를 흘려보내지 않고 글로 옮겨보려는 노력, 다각도로 살펴보려는 노력, 좋아하는 예술 작품을 내 삶의 맥락 안에 놓아보려는 노력. 그게 내 깊이를 만들어줄 거라고 믿고, 그냥 한다. 다른 생각할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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