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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Nov 06. 2019

미술관 가기 전, 예습하시나요?

저는 어릴 때 세계 지도 보기를 좋아했습니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가장 좋아한 과목은 세계사였고요. 외국어로 된 낯선 지명, 도시명, 문명 이름 따위를 보면 낭만적인 몽상에 빠져드는 기분이었어요. 피곤한 현실 속에서 잠시나마 먼 곳, 다른 시간대를 굽어 보면 어쩐지 마음에 여분의 공간이 마련되는 느낌이 들었죠. 


이 막연한 호감은 문화사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습니다. 대학교 때는 미술의 이해, 비교문화론, 서양사, 세계 문화와 종교, 문화예술사 같은 과목을 수강하기도 했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학 공부를 할까 잠시 고민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 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부담감과 논문보다 쉽고 재미있는 글을 읽고 쓰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신문방송학 전공을 살려 잡지 에디터로 생업을 시작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유럽 미술관에 갔던 2005년 무렵의 저는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미술관 가기 전에 해당 미술관에 어떤 유명 소장품이 있는지, 그 작품이 미술사적으로 왜 의미있는지, 화가가 의도한 바는 무엇인지 찾아보길 좋아했어요. 미술관에서 오디오 가이드는 필수로 챙기고, 도슨트 해설도 가급적이면 들으려 했고요. 혼자 봤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디테일을 짚어주는 게 좋았습니다. 이런 예습은 모두 그림을 잘 즐기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었죠. 


미술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감상법 덕분에 즐거웠던 순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벨기에 앤트워프 성모대성당에 가서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십자가에 올려지는 예수(<플란다스의 개>에서 주인공 네로가 그토록 보고싶어 한 바로 그 작품입니다)’를 직접 볼 때 제 안에서 이런 감탄사가 터져나왔어요. 


‘와, 이게 바로크구나!’



파울 루벤스, 십자가에 올려지는 예수, 1610-11



인물들이 비스듬한 삼각형 모양으로 화폭에 배치되어 상승감과 역동성이 느껴지고, 경계 표현은 흐릿하며, 신체는 꿈틀거리는 곡선으로 그려지고, 흡사 누군가 화폭 바깥에서 성스러운 빛을 쏘아 보내는 것처럼 사선으로 스며드는 빛의 존재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그림. 그간 책에서 읽었던 바로크 시대 미술의 정수를 눈 앞에서 확인하는 기분이었고, ‘와, 이거였구나’ 하는 짜릿함을 느꼈습니다. 


로마 바티칸 미술관에 방문했을 때는 소그룹 투어를 신청해 하루종일 해설사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도 했어요. 쪽집게식으로 요점만 딱딱 짚어주는 가이드는 명쾌하기 이를 데 없었고, 각종 미술책에서 보던 명화를 대면하고 확인하는 기쁨도 나름대로 강렬했습니다. 

그 감정의 정확한 정체는 ‘와! 드디어 (책에서 / 영화에서 / TV에서 봤던) 이 작품을 봤어!’라는 성취감이었죠. 엄밀히 말해 ‘봐야할 것’, ‘이해할 것’의 목록은 이미 저의 외부에 존재하고 있었고, 저는 그것을 열심히 지워가는 방식으로 미술관을 누볐습니다. 


분명 보람있다고 할 만한 경험이었지만, 일상의 묵직한 관성 안으로 돌아오면 기억 속 작품은 하나둘 빛을 잃었습니다. 열심히 읽고 귀담아 들은 작품 설명도 훌훌 잊혀졌죠. 

설령 일부가 남았다 해도 살면서 당장 처리해야 할 내면의 필요-이를테면 직장 동료의 언행이 은근히 짜증을 유발할 때, 재능이라는 것이 눈꼽만큼이라도 있나 싶어 좌절스러울 때, 누군가를 향한 나의 감정이 썸인지 호감인지 사랑인지 나조차도 모르겠을 때-에 응답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기억에서 휘발되었죠. 한마디로 바로크를 이해하는 것과 내 삶을 사는 것은 별개였습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빈센트 반 고흐 무덤



한편, 비슷한 시기에 강렬한 끌림으로 프랑스 북부에 있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무덤에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 미술사에서 의미있는 화가이지만, 단지 미술사적 명성 때문에 제가 그곳까지 걸음했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아름다운 그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죠. 그림이 목적이었다면 미술관만 가도 충분하니까요. 


반 고흐 형제의 무덤까지 저를 이끈 것은 ‘만나야 한다’라고 속삭인 직관의 신호였습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끌림이었지만, 정말 그뿐이었습니다. 제 두 다리를 움직여서 그가 뉘인 곳에 서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반 고흐 형제 무덤에서 갑자기 납득하기 어려운 눈물이 터졌고, 수첩을 찢어 편지를 써놓고 내려오는, 평소의 저라면 하지 않았을 일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인 여행이었지만, 이날 이후 저에게 빈센트 반 고흐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해졌습니다. 다른 화가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빈센트 반 고흐에 끌렸던 것인지, 그의 생애와 그림이 제 내면의 허기를 어떻게 어루만져 주었는지, 왜 굳이 무덤까지 가보고 싶었던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생각을 굴리고 반추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여행을 할 당시에는 모호하고 막연했던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의 의미가 여행이 끝난 뒤 제 삶 속에서 서서히 완성되는 느낌이었죠. 




두 종류의 경험 모두 미술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어떤 경험은 안전한 이해의 영역에서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다른 어떤 경험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저를 데려가 얼을 빼놓았습니다. 어떤 감상은 전과 후의 제가 같았고, 어떤 감상은 전과 후의 제가 달랐습니다. 



자연스럽게 자문하는 시점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림을 왜 보는 걸까? 전자와 후자의 경험 중 나는 어떤 쪽 경험을 추구할까? 무엇을 위해 미술 관련 책을 읽고, 미술관에 갈까? 대답은 쉽게 나왔습니다. 


“감동하고 싶어서지.” 


감동이라는 단어 안에는 움직임과 떨림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감동할 때 우리는 무언가 나에게 충돌해왔음을 느끼고 전율하지만, 그것의 정체를 정확한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상태에 빠집니다. 그 일이 벌어진 장소가 분명 나의 내부인데도 흡사 처음 발을 딛는 낯선 곳에 도착한 것처럼 느끼죠. 


감동하는 자아는 보호막을 잊고 스스로를 무언가에 찔리도록 개방합니다. 감동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흔들리며, 흔들리기 때문에 중심을 새로이 잡아야 할 내면의 필요와 마주합니다. 예전과 다른 내적 질서를 가진 사람이 될 가능성의 문이 열리는 것이죠. 시리 허스트베트가 <살다, 생각하다, 바라보다>에서 쓴 아래의 문장은 ‘책’ 자리에 ‘그림’을 넣어도 유효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의 삶을 재배열할 힘을 갖지 못한 다른 책(그림)들은 주로 완전히 잊힌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머무는 책(그림)은 우리가 된다.” 


곰곰 생각해보면 감동은 첫 만남에서 가장 극대화됩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영화라 해도 여러 번 보면 (볼 때마다 다른 발견거리가 있는 작품도 물론 있지만) 첫 감동만큼 강렬한 감정을 느끼긴 어렵습니다. 제가 만약 반 고흐 무덤에 다시 간다면 처음과 같은 감정을 또 느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감동하기’가 미술 감상의 목적이라면 선입견 없는 백지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요. 외부에서 주어진 해석이 없을 때는 자신의 반응에만 집중하게 되므로 오히려 스스로를 열어놓을 확률이 높다고요. 





이제 저는 미술관 가기 전에 예습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작품을 보게 될지, 누구에게 끌림을 느낄지, 무엇을 얻고 나올지 모르는 채로 스스로를 불확실성 안으로 던져 봅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는 마음으로 작품 앞에 섭니다.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 작품이 이어질 때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일순간 어? 하면서 시야의 초점이 또렷이 맞는 작품, 한참 들여다보고 나서도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 작품, 지나치고 나서도 어쩐지 눈길이 자꾸만 가서 뒤돌아보고 싶어지는 작품과 만납니다. ‘여기에 너를 흔들고 재배열할 무언가가 숨어 있어’라고 직관이 신호를 보내는 겁니다. 


작은 부딪힘의 파동을 소중하게 품고 집으로 돌아와 그때부터 화가에 대해, 그가 살았던 시기와 작품에 대해 자료를 찾아 읽습니다. 때로는 미술과 상관없는 철학책이나 인문서를 뒤져보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공부를 하는 거죠. 

하지만 이 공부는 아는만큼 보인다고 믿으며 그림 해설을 들여다보던 시절에 했던 공부와 완전히 다른 감각을 남깁니다. 훨씬 더 와닿고 재미있습니다. 나에게 신호를 보낸, 다시 말해 관계의 끈으로 이미 연결된 각별한 대상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니까요. 공부라기보다 ‘덕통사고’ 후 ‘떡밥’을 찾아 헤매는 과정과 더 닮았습니다. 조사하다보면 ‘아, 이래서 내가 이 작품에게(화가에게) 끌렸구나’ 뒤늦게 이해가 도착할 때가 많습니다. 저만의 의미화 작업이 완료된 것입니다. 


'독자가 그림을 마주하고 자기 안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느낌, 인상, 연상, 기억을 소중히 여기게 돕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저의 유일한 관심사입니다. 여기에서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은 ‘감상에 무슨 사유가 필요해요, 그냥 느끼세요’라는 식의 무조건적 긍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느낌, 인상, 연상, 기억의 출처와 의미를 곰곰 따져보고 언어를 통해 그것들을 바깥으로 끄집어 내보는 경험을 해보자는 권유입니다. 감성의 영역이라기보다 지성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죠. 

강남순 철학자는 <배움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크게 보자면 두 종류의 배움이 있기 때문이다. ‘나’가 부재한 정보의 축적으로서의 배움과 ‘나’가 개입된 성찰적 배움.” 그림과 만나는 일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나'를 개입시키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하고, ‘정보의 축적’으로서의 그림 감상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우리가 미술 작품을 볼 때 알게 모르게 전제하거나 당연시하고 있는 생각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감상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이어질 글에서 이 질문을 하나씩 풀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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