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번의 투자 거절과 66번의 IR 자료로 만든 브랜드
창업 초기, 우리가 가장 많이 만난 사람들은 고객도, 친구들도 아닌 바로 VC 투자자들이었다. 2016년도 TEA 사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약 1년 여 동안은 티소믈리에 교육기관에서 차를 공부하며 우리끼리 소박한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는데, 당시 IT 스타트업 대표였던 지인의 가벼운 제안이 우리의 미래를 크게 바꿔 두었다. 정통 소비재나 식음료 회사도 IT 스타트업처럼 투자를 받고 스케일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벤처 투자 업계 문외한이었던 우리는 ’제품 만들어서 판매하는 일반 유통 회사가 어떻게 혁신적인 차별화가 있겠냐’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한번 본인들이 투자받은 VC 대표님 소개해줄 테니 만나보라는 설득에 난생처음 IR DECK이라는 투자 유치를 위한 자료를 만들고 첫 미팅에 나섰다.
처음 만난 VC는 당시 국내 엔젤 투자 회사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유명한 곳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투자업계 물정을 전혀 몰랐다), 그곳의 포트폴리오는 주로 IT나 소프트웨어 기반만 투자했었는데, 새롭게 F&B 분야 펀드를 조성하던 차에 처음 만난 곳이 우리라고 한다. 투자받을 계획도, 받으면 어떻게 기업 성장을 시킬지도, 거창한 미래 계획도 없이 급히 준비한 자료였기에 반신반의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마음을 내려놓고 갔다. 그럼에도 타이밍이 좋았던 것인지 두어 번 자료가 오가고는 투자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다.
“F&B도 투자를 받을 수 있다고?“
물론 당시 해외에서 스타벅스가 티바나를 인수하는 사례도 생기며 차 시장에 대한 관심이 글로벌적으로 커지고 있던 점, 블루보틀이 높은 기업 가치액으로 네슬레에 인수되는 선례들이 점점 생겨나며 정통 식음료 산업에서도 긍정적인 투자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서는 푸드 테크나 소프트웨어 서비스가 접목된 배달 앱들에서만 호황이었기에 우리 같은 단순 브랜드 전략으로는 가치 책정 기준을 어디에 둘지 참 난감한 숙제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어느 VC 기관에서는 우리에게 제조 공장을 설립하고 다시 만나자거나, 티백 모양을 혁신적으로(?) 디자인해서 특허를 낸다면 바로 투자하겠다고 하는 곳들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별다른 혁신(?) 없이 투자를 해줄 테니 밸류 금액을 제안 달라하셨고, MVP 상품만 있던 상황에 매출도 없어서 얼마를 기준치로 해야 할지, 시장 규모는 어디 기준으로 해야 할지 시작도 전에 발이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결국 우리는 국내가 아닌 해외 시장 진출로 밸류 기준을 두자고 마음을 먹었고, 매출도 나지 않은 상황에 미래 시장 점유율도 글로벌 슈퍼푸드 시장으로 기준을 잡았다. 당시 자신감과 열정은 구름을 뚫고 우주까지 뻗어 나갈 기세였던 것 같다…… 결론은 당연히 서로 간 제안한 밸류 금액이 맞지 않아 거절하긴 했지만, 투자 가능성을 한번 맛보고 나니 다른 투자 기관들에게도 역으로 제안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우리는 그렇게 험난하고 어마무시한 투자유치의 길을 들어서게 되었고, 첫 Seed 투자부터 Pre-A 단계까지 총 50번 이상의 투자 거절과 66번 이상의 IR 피칭을 하러 다니는 스타트업이 되어 있었다.
시드 투자를 받기 위한 약 5개월 간은 시생산용으로 만든 5종류의 티백과 뜨거운 물을 담은 보온병, 그리고 일회용 소주컵 1줄씩 가방에 넣어 다니며 IR 발표 미팅에서 차를 함께 우렸다. 어느 날에는 미팅이 끝나고 허겁지겁 정리하고 나왔는데 보온병 뚜껑이 다 닫히지 않았는지 가방 속에 있던 지갑, 다이어리, 노트북들이 뜨뜻하게 적셔진 적도 있었다. 큰 보온병과 티백들을 한 움큼 가방에 넣어 다니는 스스로의 모습이 엘리베이터에 비치었을 때 마치 출장 다니는 다방 아가씨가 된 것 같은 현타가 수시로 오기도 하였다.
처음 만나는 다양한 심사역들과 LP분들에게 짧게 명함을 건네고는 15분 만에 우리 회사의 가치와 가능성을 설득시키는 일. 우리의 가치를 팔러 다니는 과정은 이전 직장인으로서는 절대 느낄 수 없었던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심리적으로 꽤나 강노동이었던 일이었다. 단 한마디로 설명되는 강력한 기술의 차별화, 압도적인 시장의 성장성을 지닌 IT 산업이 아닌 것이 이렇게 외면받고 처절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그들에게는 브랜딩 전략 하나만으로는 당연히 통하지 않았고, 어느 때에는 ‘요즘 누가 차를 마시냐’, ’디자인 가지고 되겠냐’, ‘그냥 작게 구멍가게 하시겠다는 거 아니냐‘ 하는 뼈아픈 핀잔들을 매일 같이 듣고 오기 일쑤였다.
시드 투자를 받기까지 투자 거절 횟수는 이미 50번이 훌쩍 넘었다. 수중에 가진 것은 퇴직금으로 만든 시생산용 티백이 전부였기에 본 제품으로 만들어 제대로 알리고 싶었던 마음 하나로 후반에는 결국 자신감 넘치던 시장의 논리가 아닌 창업자의 처절한 절박함으로 시드 투자 유치가 이루어졌고, 신기하게도 가장 큰 비평(?)을 남기셨던 투자자 대표님(퓨처플레이 류중희 대표님)이 우리의 첫출발을 도와주셨다. 그리고 그때 마셨던 엄청난 고배의 쓰디쓴 맛과 류중희 대표님의 강력했던 쓴소리는 6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큰 자양분이 되었다.
우리는 투자유치 과정 이후 압도적인 기술력과 차별화가 없다는 것을 빠르게 인정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IT처럼 빠른 성장 곡선을 그리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또한 객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결핍과 제약은 반대로 또 반대의 차별화를 만들기도 한다. 기술이 없다면 진정성을, 빠른 매출이 안될 거라면 느린 성장을 택하기로 마음먹고 투자자 분들에게도 저희는 구멍가게처럼 운영할 팔자이니 빠른 투자 회수는 포기(?) 해달라 했다. 곧이어 코로나도 겹경사로 겹치면서 투자자 분들께서도 반 포기하셨던 것인지, 기준이 낮아지신 건지 어떠한 성과 압박도 없이 매 년 조금씩 올라가는 성장세에 오히려 의외의 인물들로 다뤄주시곤 하신다.
우리는 결코 IT 스타트업처럼 속도가 빠를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체감한다. 개인의 일상 속 깊숙한 자리에 차가 천천히 우러나듯 스며드는 것이 브랜드 인지인데 어떻게 거대한 혁신 기술이나 마케팅 한두 번 만으로 빠르게 자리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외부 투자를 받은 것은 우리에게 우연이 아닌 분명 운명의 경험과 자산이 되었다. 아무리 창업가 개인이 좋아서 시작하는 브랜드라 해도 수요 없는 공급이 되면 결국 비즈니스의 기본적인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것, 그리고 브랜드 생명의 지속성은 창업가 개인 자본이 아닌 투자할만한 지불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시장의 자본가와 소비자가 만든다는 것을 숱한 IR의 피칭과 그때 쌓은 피드백들을 통해 배웠다.
예술이 아닌 비즈니스로 브랜드를 바라보는 관점은 나에게도 회사에게도 큰 배움의 동력이 되었다. 투자받기 전과 후로 시선이 크게 바뀌기 시작하며 더 이상 취미가 아닌 일이 되는 조건의 형태로 진정한 일로써 바라보게 되었고, 자본의 흐름을 철저하게 이해하며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과 의무를 얹혀 주었다.
PRE-A 단계까지 투자를 받고, 이후로는 자생하며 유의미한 성장률을 만들어 갈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 우리의 험난했던 외부 투자 유치 과정은 어느덧 4년 전에 멈췄지만 여전히 초기 사업계획서를 수시로 들춰보며 그때의 뜨거웠던 보온병만큼 이상적인 목표와 꿈을 다시금 되새기곤 한다. 변화되는 또 다른 과정 속에서 변하지 않는 우리의 원칙은 무엇이었는지 귀중한 나침반의 폴더가 되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