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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카엘라 Aug 31. 2015

[1화] 어쩌면 첫사랑같은 이야기

주섬주섬 손빨래를 하다가 문득

어렸을 적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 장면이 탁 하고 떠오르니 줄줄이 이어져서

그 애 생각이 멈춰지질 않았다.

아주 어렸을 적은 아니고 초등학교 6학년 즈음의 이야기.

나는 6학년 때 전학을 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학원 드라마의 한장면처럼 한 친구와 친해지게 되었다.  


또래에 비해 (+나에 비해는 훨씬) 키도 훌쩍 크고

얼굴도 예쁘고

태권도를 하고 있던 애라서

늘 짧은 단발머리에 도복을 입고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왠지모르게 성숙미가 있는 여자애였다.

심지어 그 애는 학교에서 일명 "짱"이었다.


날라리여서는 아니었다.

아이들을 괴롭히지도, 규율을 어기지도

선생님에게 반항을 하지도 않았다.

정말 말 그대로 싸움을 제일 잘해서 짱, 인 애였다.

여느 일진들처럼 눈썹을 그리지도 담배를 피지도

 머리에 젤을 바르지도 않았다.

까부는 성격도 아닌, 조용하고 진중한 여자애였지만

얼굴도 예쁘고 호리호리해서 남녀불문하고 인기가 많은 사기 캐릭터였다.

실명을 쓸 수 없으니 J라고 하겠다.


전학온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집에 가는 길에 의도치않게 J와 계속 마주쳐서 "어, 너도 집이 이쪽이야?" 라고 하며 말을 트다가 낯가림의 시간이 끝난 후 자연스럽게 등하교를 같이 하게 되었다.


처음엔 워낙 조용한 성격이었던 애라 뭘 하며 놀았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애 집에 자주 갔던 것같고, 국자에 뽑기(;;)같은걸 해먹으며 놀았던 것같다.  

어쩐지 기억이 다 뿌옇고 선명치가 않은데

그 애 집에서 국자를 세 개인가를 다 태워먹고 전전긍긍 하던 기억이 난다.

난 중학교에 진학한 후 심장 수술을 했기 때문에 수술 전이라 나는 몸이 늘 약하고 자주 아팠다.

J는 곧잘 내 가방을 들어주었다.

어느 상황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무뚝뚝한 얼굴로 내 가방이나 신발주머니같은걸 자기가 들쳐매던 장면이 생각난다.


손빨래를 하면서 J에 대한 생각이 났던 건 이유가 있다.

우리가 주번이었는지 단순한 선생님의 심부름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때 무슨 손걸레(?)를 빨았어야 됐었는데 선생님이 락스를 사서 오래 담궈놓고 걸레 한번 행주 만들어보자셨고, 그 락스통과 걸레 몇 개를 들고 수돗가에서 J와 나는 둘이 걸레 빨래를 했다.

근데 둘이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깨끗해지질 않아서 그 락스 한통을 다 쏟아 부었다.

그게 뭐가 그리 웃기다고 거의 한시간 넘게 열심히 걸레를 빨면서 엄청 웃었는데 결과적으로 걸레가 깨끗해지지 않아서 그당시 선생님이 "걸레는 아무리 빨아봐야 걸레인가봐~" 하고 웃고 넘어가셨는데  

그 다음날.

학급회의 시간에 건의 사항 말하는 시간에서 갑자기 반 친구 중 어떤 여자애가 손을 번쩍 들더니

"어제 하교길에 혜진이와 J가 걸레를 빨면서 락스를 한통을 다 쓰는 걸 보았습니다. 적당량을 쓰지 않고 한통을 다 써서 환경오염을 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같은 건의 사항을 발표했다.

담임선생님이 얼굴이 빨개지셔서 "그건 내가 부탁한건데..." 라고 하시며 매우 부끄러워하셨고, 우리한테 미안하다고 하셨던 것 같다. 발표한 여자애는 평소 J를 아주 좋아하던 애였다.

그땐 왜 뜬금포로 저런 말을 하지? 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그당시에는 그런 방법 밖에 찾지 못할 나이였던 것같다. 내가 기분이 나쁜건, J를 혜진이에게 뺏겼기 때문이 아니야. 다만 락스를 너무 많이 쓰는게 언짢았을 뿐이야 라고. 그래서 손빨래를 하면서 그 애가 생각났던 것 같다.

하얀 옷의 얼룩이 아무리 담궈놔도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하튼 그러던 어느 날,

6학년 여자애들 사이에서 뭔가 트러블이 있었던 것같다.

다른 여자애들이 그 친구한테 와서 니가 좀 와봐야할 것 같다며 하교 후에 쓰레기소각장(...)에서 집합을 했다.

J는 나한테 금방 끝난다며 10분이면 되니까

잠깐만 기다렸다 같이 가자고 해서

얼결에 나도 그 쓰레기 소각장에 잔류;; 하게 됐는데,

두 여자애들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 시작했고

서로 뺨도 때리고 그랬던 것 같다.

J는 마치 심판처럼 조금 높은 계단 자리에 앉아 둘을 관전하다가 싸움이 끝나자

둘 중 한 여자애를 심판하듯 한 명의 목을 기술적으로 손으로 탁 잡아채며 뭐라뭐라 말을 하고 상황을 정리했다.


쓰레기 소각장에서 벌어지는 13살들 사이의 '가혹한 계급 차이' 가 훅하고 마음에 들어왔다.  

한 손으로 그 여자애의 목을 탁, 소리 나게 잡던 장면이 그 시절 나에겐 너무나 임팩트가 강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늘 있어오던 일인 것 같았기에 나는 따로 그애에게 그 일에 대해 묻진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그 애는 태권도를 그만 두었고, 짧은 머리로 도복을 입는 것도 끝이 났다.

운동부로 진학하는걸 부모님이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같은 중학교로 진학했는데 남녀공학이었고, 입학 전부터 유명했던 그 친구는 입학과 동시에 인기인이 되었다.

그러더니 학교에서 제일 인기 많다는 중3 오빠랑 사귄다고 했다.

그 오빠도 체육대회 계주에서 마지막 주자같은걸 하는 전형적인 인기쟁이였다.

그 친구는 이런 이런 오빠랑 사겨 라고 했고 나는 아아 그렇구나 라고 했던 것같다.

그 친구는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학교의 날라리 언니 무리들의 러브콜을 받아 친해졌다.

초등학교의 날라리들과는 달리 중학교의 날라리는 방과 후마다 모임같은게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대로인데

J도 그대로인데

중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나와 J의 계급이 달라져있었다.



어느 날 J가 쓰레기 소각장에서의 그 날처럼

미안 미안 십분만기다려줘, 라고 말했는데

내가 "아냐 이제 저 친구들하고 집에가~ 나도 반친구들하고 갈게." 라고 말했다.

왜 그랬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온통 정확치 않은 것들 뿐이다.)


방과 후 J와 함께 서있을 때 마다 일종의 박탈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친구의 날라리 친구들의 시선에서 "쟨 우리 계급이 아니자나" 같은 눈빛을 느꼈던것도 같고,

그냥 평범한 친구들과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욕망이 컸던거 같다.


"낼부터 나 학교 일찍 나와야해~  따로가자~" 로

오래 지속되었던 등하교협정을 단박에 끊었다.

말주변이 없던 그 애가 응? 어라 어버버 거리는 사이에

뒤돌아서 왔다.

그때는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학교에 먼저 가버리면 그만이었고

그 뒤로 학교에서 의도적으로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J가 싫어진 게 아니었다.

여전히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학교라는 단체가 만들어낸 계급에

가급적 조용히 순응하고 싶었다.


원하던 대로 반 친구들과 평범한 학교 생활을 했다.

가끔 마주치는 J는 운동을 그만두고는 점차 여성스럽고 성숙해졌고,

어색한 눈인사도 점점 생략하게 되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 때였던가, 방학식이었던가.

그 애의 크리스마스 카드가 책상 위에 올려져있었다.

굉장히 간단한 내용이었던거 같은데 내용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다음 해부터 그애도 카드를 쓰지 않았다.



그 애와 다시 만난건 대학교에 진학한 후 동네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다.

동네 아주 작은 호프집이었는데,

일주일에 한 두번 이른 바 "온라인 미팅 모임"을 정기적으로 열던 호프집이었다.

거기엔 호구 남자들의 주머니를 터는 '방장'들이 있었고,

남자 여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자들은 방장의 지인들이 많았다.

집 나와서 갈 데 없는 여자애들은 그 미팅으로 끼니와 술과 용돈을 해결했다.



나는 그 방장이라는 사람들을 좀 경멸했다.

마초에다가 여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무식한 인간 유형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여자친구도 그 자리에 앉혀서 다른 남자와 손잡고 게임도 하게 하고,노예팅에 내보내서 남자들에게 크게 한 몫 떼어내기도 했다.

저 남자들도 저 남자의 여자친구란 사람들도 하나같이 다 병신같다고 생각했었는데,

J가 나타났다.

그 방장 중 한 명의 여자친구라고 했다.


긴 머리를 허리까지 찰랑거리며

딱 붙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여전히 눈빛은 차분했다.


어어?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좋아하던 마음은 변함이 없어서 매우 반가웠다.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고,

히, 그대로다. 넌 예뻐졌다.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J는 10년이 흘렀지만 13살 때처럼 차분하고 따뜻한 눈으로 웃었다.

당시 호프집 사장님에게 마구 자랑을 했다.

초등학교 때 친구인데요, 그 때도 디게 예뻤었어요-


그 당시 그 알바는 꿀알바로 6-11시정도까지만 하면 되어서 마감도 다 사장님 몫이었고,

젊은 총각이었던 사장님은 힘든 일은 다 자기가 하고 나는 칼퇴근을 시켜주는 좋은 분이셨다.


그날도 역시 11시 땡치고는 나는 칼퇴근을 했다.

J를 향해, 다음에 봐- 연락할게. 라고 말하고는.

이제 우리 사이를 막을 수 있는 계급 차이같은 건 없으니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알바에 출근을 하니 사장님이 조심스레 말했다.

어제 너 가고 난 후에, 니 친구라던 애랑

그 남자친구인 방장이 싸워서 경찰이 왔었다고.

J가 그 남자 뺨을 때렸고,

그 남자가  J의 머리에 소주잔을 던졌고

J는 더이상 상대하지 않고 바로 112에 신고해서

경찰을 불렀다고 한다.


현명하네,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발차기로 날려버렸으면 좋았을 껄. 이라고도.


며칠 뒤부터 그 병신같은 방장은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지만

J는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나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

나도 하지 않았다.

그 방장에게도 묻지 않았다.

그 뒤로는 우연히도 마주친 적이 없다.


나는 왜 J의 기분은 생각해본 적이 없을까.


쓰레기 소각장에서 반친구의 목덜미를 잡았을 때 그 애는 별로 기뻐보이지 않았는데

중학교에 올라가 날라리 언니들이 저만치서 그애가 오길 기다리며 서있을 때 별로 행복해보이지 않았는데

방장의 여자친구라고 왔을 때도 무미건조한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단한 번도 "너 괜찮아?"라고 물어본 적이 없다.


마치 어린 시절 첫사랑이야기 같이

먼지 쌓인 기억 어느 한 편에서 자꾸 맴도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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