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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sian Dec 31. 2019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지친 당신을 위한 처방전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일요일 아침, 휴대전화가 잠들었다.


밤새 충전잭을 꽂아둔 휴대전화는 가느다란 빨간 줄 하나만 남기고서 충전하라는 그림만 뜬다. 충전 잭 접촉에 문제가 있나 싶어 잭을 뺐다가 다시 꽂아둔 채 한두 시간이 흘렀을까. 여전히 까만 바탕에 배터리 표시 그림 속 빨간 줄 하나만 깜빡인다. 전화는 좀처럼 깨어날 생각을 않는다. 사실 배터리가 광탈한 지 두어 달쯤 되었다. 완충하고 외출하면 배터리 잔량은 금세 반토막 나서 어딜 가든 충전기를 들고 다녀야 했다. 전조증상은 이미 시작됐던 것.  ‘나, 정상이 아니야, 그러니까 신경 좀 써 줄래?’라고 전화는 내게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음에도 최대한 버틸 때까지 버텨보겠노라고 객기를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무려 만 5년이나 연을 맺고 있는 나의 전화기. 2년 전에도 배터리 방전 문제로 교체했고, 아이가 퐁당퐁당 돌을 던지듯 설거지물에 퐁당 빠뜨리는 바람에 침수는 물론, 액정 깨짐 사고로 화면을 전면 교체한 적이 있다 보니 전화로선 산전수전 다 겪은 셈. 그럼에도 제 기능을 해 준 덕에 각별히 정이 들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이별해야 한다니! 받아들일 수 없어! 결국 난 패드를 꺼내 일요일임에도 수리가 가능한 업체를 검색하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


배터리 교체 직전에 확인해 보니 배터리는 전원이 켜지는 최소량의 에너지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정말 완전히 방전된 것이 맞았다. 다행히 빠른 대처로 전화는 곧 생의 날개를 달았고, 이 글을 수시로 작가의 서랍에 넣었다 뺐다 하고 있는 걸 보면 정상적으로 작동 중인 게 확실하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계속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어제와는 180도 다른 오늘이. 그런 순간이 눈 앞에 불현듯 펼쳐진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폴란드 출신의 소설가,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올가 토가르축의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을 보다가 문득 떠오른 질문이다. 마침 이 그림책을 본 것이 허당 주인에게 경고의 시그널을 보내고서 홀연히 꺼져버린 휴대전화를 고친 다음날이라 더 감정이입이 된 탓일까. 애정해 마지않는 휴대전화의 심정지 이상은 새 제품으로 신속하게 교체하여 생을 이어간다지만, 우리네 삶은?


어느 날, 출장길 한 호텔방에서 한밤 중에 깨어난 남자가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영혼은 저 멀리, 어디에 두었는지도 새까맣게 잊을 만큼 그는 일을 아주 많이, 그리고 빨리 하던 사람이었다.


‘몸속에 이미 어떤 사람도 없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 잡혀버린 그. 거울 속 텅 비어버린 자아와 맞닥뜨린 순간, 제 이름조차도 기억 못 하다가 여권을 뒤져 보고서야 얀이라는 이름을 확인한다.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영혼은 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큰 혼란이 벌어져요. 영혼은 머리를 잃고, 사람은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거죠. 영혼들은 그래도 자기가 주인을 잃었다는 걸 알지만, 사람들은 보통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의사의 진단을 들은 그가 불안해하며 묻는다.



제가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말씀입니까?



영혼이 가출했다는 말. 이 남자에겐 틀린 말이 아니다. 어쩌면 바쁘게, 빨리, 많이 일처리를 해 왔던 것도 ‘영혼 없이’ 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챙기는 시간이 1분 1초라도 있었다면 그는 그렇게까지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살진 않았으리라.


바꿔 말하면, 제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가 단 한 톨이 없을 만큼 쳇바퀴 돌듯 그의 바쁜 삶은 이유 없이 당연한 하루하루의 연속이었을 터. 작가가 말한 ‘마치 수학 공책의 가지런한 모눈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은 빈틈없는 일상 말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어슴푸레한 새벽녘, 자동 반사적으로 일어나 덜 깬 영혼을 살살 달래어 출근길에 몸을 싣고 저마다의 분신 같은 휴대전화 창을 통해 소소한 행복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일상의 빈틈에 새어 들어가는 한 줄기 빛이 언제 있었던가 싶게 우린 다시 각자의 생존지로, 그에 맞는 가면을 장착하고서 전진한다.


갑작스레 다가온 공황상태에서 남자의 선택은 과연 옳았다. 현명하고 나이 든 의사를 찾아가 자신을 진단받기로 했으니 말이다. 초점 없이 흐릿한 표정, 어깨가 축 처진 이 남자에게 의사는 처방전을 내린다.



자기만의 어떤 장소를 찾아
편안히 앉아서 영혼을 기다려야 합니다.
제가 드릴 다른 약은 없습니다.




‘스트레스받지 말고, 쉬고, 적당한 운동을 하세요’ 지당한 말씀 감사합니다- 를 연상케 하는 의사들의 흔한 처방이 아니다. 남자에게 기회와 선택, 그리고 시간의 필요성을 환기시키는 말이다. 추상적이고 애매하지만 답은 남자 스스로가 찾아야 하는 것이니

방향성을 던져준 것만으로도 그로서는 생의 터닝포인트 앞에 선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이제,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듯한 그림책 커버의 빛바랜 느낌이 마치 종이가 숨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볍고 편안해진다. 표지를 넘기자 아스라이 기억 저 편으로 멀어진 흑백사진 한 장이 새겨져 있다. 소리 없이 눈이 소복이 쌓인 공원을 지나치면 소음을 집어삼킨 설경과 흐린 겨울의 시퍼런 찬 공기가 어우러져 짙푸른 겨울의 내음이 훅 치고 들어온다.


눈이 오지 않는 매정하고 건조하기만 한 이 겨울에 만난 [잃어버린 영혼] 그림책에는 계절의 깊이감과 색감 자체가 다른 폴란드 감성이 물씬 배어있다. 폴란드 그림작가 요안나 콘세이요가 그린 그림은 책의 물성과 질감에서 번지는 감정, 빈티지한 감성까지도 꼼꼼하게 잘 챙기고 있어 과연 2018년 볼로냐 라가치 픽션 수상작답게 빛이 난다. 그래서 더더욱 이야기의 전개와 결말을 섣불리 말하기보다는 직접 그림책을 만져보고 들여다볼 것을 권유한다.


이야기의 끝에 나탈리아 체르니셰바의 [다시 그곳에] 그림책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지치고 힘들어 숨이 턱턱 막혀오는 순간에 누군가는 안식처가 되어 줄 인연인 소울메이트(가족,  친구, 연인, 지인 그 누구든)를 만나러 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허한 기운을 달랠 소울푸드를, 혹은 저마다의 특별한 여행지를 찾아 떠나기도 한다.


나탈리아 체르니셰바 그림책 [다시 그곳에] 중에서


글 없는 그림책 [다시 그곳에]의 배경이 되는 인적 드문 시골길과 소박한 시골집은 [잃어버린 영혼]과는 다른 단출한 풍경, 다른 공기의 장소이지만 이야기의 맥락만큼은 깊이 연결되어 있어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화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으로 보자면 [잃어버린 영혼]이 훨씬 장편에 가까운 편인데, 주인공 남자의 고독하고도 절실한 바람이 짙고 깊게 드리워져 있다.






2020년 새해를 앞두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마치 우주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은 낯선 숫자의 조합이 여전히 영 어색하기만 하다. 올해 마지막 날의 그 끝에서 만난 [잃어버린 영혼]. 두 아이가 클수록 나의 유년시절을 소환하는 기억의 접점도 점점 늘어간다. 때론 숨이 턱턱 막히는 출구 없는 터널 같은 일상에서도 이따금씩 반짝거리는 순간의 틈이 있다. 그러한 빈틈 속에 꽉 들어찬 살아있는 영혼은 길을 잃은 자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더 하고 싶은지 이끌어주는 내면의 가이드가 되어줄 거라고 믿는다.


‘자기만의 어떤 장소를 찾아 기다려요.’ 잃어버린 영혼을 만나는 법은 이것 하나면 된다.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의식(ritual)을 치르는 시간을 순순히 허락하는 일. 무엇이든 간에 자신에게 중요했던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어느 때보다도 억지스럽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연말을 보내려 하고, 그러고 있는 중이다. 아직 낯선 2020 새해 숫자 앞에서 어색해진 기운을 감출 순 없지만, 새 챕터가 열리는 만큼 새로운 무의 공간에 어떤 페이지를 채워나갈지 문득 설레기도 한다.



[Dear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 중에서
올가 토가르 축 글 / 요안나 콘세이요 그림
이지원 옮김 / 사계절(2018)


............


“이 책은 어른 속에 살고 있는 꿈 꾸는 아이를 위한 책이에요. 우리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그때는 지루해할 줄 알았고 그 지루함 속에서 멋진 것들이 탄생하곤 했죠.”

_ 올가 토가르축




올가 토가르축(Olga Tokarczuk)

1962년생. 2018년 제118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폴란드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바르샤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2018년 [Flights]로 맨 부커 상을 수상했다.



요안나 콘세이요(Joanne Concejo)

1971년생.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폴란드 그림 작가. 이 책으로 2018년 볼로냐 라가치 픽션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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