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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sian Nov 01. 2020

아이처럼, 지난날의 그때처럼

작지만 큰 세상 <은이의 손바닥>


유년시절, 나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는 상가 뒤편에 자리한 너른 주차장 공터가 전부였다. 삼삼오오 모이면 고무줄넘기를 하고 뛰어놀고, 붉은 벽돌을 갈고 갈아서 소꿉놀이에 고춧가루 양념으로 쓰고, 어느 날엔 누군가 교회에서 연극이란 걸 배워 와 한 사람씩 역할을 맡아 아무 말 대잔치에 버금가는 상황극을 벌이다가 어둑어둑 해가 지면 엄마의 부름에 서둘러 각자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빨간 대야 한가득 담긴 미지근한 물에 손을 담가 비누로 빡빡 씻은 물을 보면 그날 하루 얼마나 땀을 빼고 영혼을 다 바쳐 놀았는지 알 수 있었다.
 
심심한 게 뭔지 몰랐던 시절의 일이다. 콘크리트 맨땅의 거친 흙바닥 한쪽 구석에는 봄에 씨앗을 뿌린 자리에 봉숭아꽃, 붓꽃이 자라나 여름엔 앙증맞은 손톱에 새빨간 꽃물을 들이고, 가을엔 붓꽃 씨앗을 쪼개어 하얀 분가루를 만들어 놀았다. 건너편 담벼락 너머로 양옥집 안마당에 심어진 대추나무가 가지를 뻗어 알이 굵은 대추 과실을 보일 때면 동네 아이들의 손은 자연스레 싱그러운 초록 대추알에 닿았다. 아직 채 익지도 않았지만 먹어보면 사각거리며 상큼 달달한 맛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곤 했던 기억이 선하다. 지치는 줄도 모를 정도로 해가 질 때까지 밖에서 뛰어놀고 들어와 먹는 저녁밥은 또 어찌나 꿀맛이던지, 삼 남매는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밥과 국을 먹으며 하루치 영양소를 몸에 듬뿍 저장하며 그렇게 성장했다.
 


*



가을이 성큼 다가온지도 모르고 코로나 이슈로 조심조심 일상을 이어오던 요즘. 문득 서른 해도 훨씬 넘는 시간을 거꾸로 뛰어넘어 놀아도 놀아도 아쉽고 부족했던 유년의 해 질 녘 어느 날의 풍경이 대형 스크린을 펼쳐도 꽉 차고 넘칠 정도로 온 몸 가득히 훅 들어왔다. 어느덧 한계치에 다다른 집콕 일상 중에 “엄마, 나 심심해... 이제 뭐 해?”라고 묻는 두 아이의 말에 이력이 나 있던 무렵이기도 했고, 때 마침 그림책 <은이의 손바닥>을 보고 난 뒤 잔상이 아른하게 남아 있던 시점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느끼는 심심함을 부모가 전부 해결해줄 순 없지만 무료함을 느끼는 환경에 대해서만은 한번 더 돌아보게 된다. 친구랑 함께 뛰어놀기처럼 완벽한 해답이 있으나 요즘처럼 예민해지는 시국엔 마음만 가까이 해도 충분하니 이전처럼 아무 때나 만나서 노는 일이 쉽지가 않다. 큰 아이의 경우, 마스크 쓰고 태권도 수련하는 게 불편하다 하여 지금까지 장장 9개월여를 쉬고 있다.  또래 동네 친구들 얼굴 보는 일도 뜸하게 되어 녀석의 얼굴에도 살짝 그늘이 생긴 듯하여 엄마로서 맘이 짠한 것도 사실.



그림책 [은이의 손바닥] 윤여림 글, 노인경 그림, 웅진주니어 2015


은이의

손바닥에
아른아른 햇살이
사뿐 나뭇잎이
올몽졸몽 씨앗이
톡 빗방울이
사락사락 눈송이가
하늘하늘 깃털이
또르르 구슬이
아롱아롱 사탕이
친구의 손이 있다.
은이의 손바닥에
은이의 세상이
있다.


그림책 <은이의 손바닥> 중에서 ㅣ 윤여림 글 ㅣ 노인경 그림 ㅣ 웅진주니어(2015)



우리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큰 세상인 자연, 그 앞에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우리는 한없이 자유롭고 풍요롭고 가벼워진다. 그림책의 주인공 은이처럼  말이다.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음껏 자연 속에서 뒹굴며 놀던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건 그저 우연은 아닌 듯싶다. 요즘처럼 만나고 움직이는 일에 숙연해지고 조심스러워진 코로나 시국에 만난 그림책 한 권의 풍경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경험이었는지, 은이처럼 뛰어놀고 있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니 어느새 마음이 착잡해진다.

 

그림책 속 주인공 은이처럼 자연을 온몸에 품고 땀을 빼고 혼을 쏙 뺄 정도로 온 몸으로 뛰어놀아야 하는데 전보다 제약이 많아진 일상에 지친 아이들도 몸 밖으로 내뱉지 못한 스트레스가 온몸 구석구석에 잔여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집구석에서 주말에만 허용된 단 한두 시간의 게임을 하고 난 뒤 게임 컨트롤러를 정리하는 아이들의 두 손은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고 공허하다. 현실에는 없는 상상의 공간에서 활약한 뇌와 눈을 쉬게 해 주어야 할 시간이 찾아오지만, 심심한 게 싫은 아이들의 놀이 갈증은 커져만 간다. 



심심함 _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는 꿈이 아니라 심심함의 세계이다. 심심함을 견디기 위한 기술이 많아질수록 잃어가는 것이 많아진다. 심심함은 물리치거나 견디는 게 아니다. 환대하거나 누려야 하는 것이다.
 
<시옷의 세계> 김소현  l 마음산책 (2012)



심심함 속에서 나름의 재미를 발견하기에는 집 안은 너무 갇힌 공간이었던 걸까. 넷플릭스 영화 채널도, DVD도, 보드게임의 고전 블루마블도, 그 외 새로 들인 신상 보드게임도, 숫자 빙고 게임도, 알까기도 심드렁해진 것이다. 레고 작품을 만들었다가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다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끝에는 꼭 형제의 난이 일어나기 일쑤. 평화는 종료되고 훈육과 반성이라는 험난하고도 어두운 성찰의 터널을 통과하면 그제야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함이 감돈다. 심심함을 견뎌내기 위해 행했던 모든 의식과 활동의 소용돌이를 걷어내고 나니 찾아오는 순도 백 프로의 심심한 시간...... 큰 아이는 책을 펼치거나 종이에 그림이든 지도든 아무렇게나 낙서를 하기 시작하고, 둘째는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 혼자 만들 수 있는 종이 접기에 집중한다. 서로를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심심한 시간을 호젓하게 누리는 것도 슬기로운 형제 생활에서 필요한 법. 하나 오래가지는 못한다는 반전이 있기 마련.


이러나저러나 집콕의 한계를 이겨내는 묘안은 마스크 무장하고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자연만이 답이다. 태양 가까이 콧바람을 쐬며 걷는 순간부터 두 아이의 몸 안으로 드나드는 에너지가 확연히 다르다. 집 앞에서 도서관까지 이어진 공원 산책길을, 되도록 나무가 심어진 부드러운 흙 길을 걸어간다. 아이들은 이미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질주한다. 운이 좋게도 사람 없는 텅 빈 공원 내 축구장에 도착해 잠시나마 마스크를 벗고 신나게 뛰어놀다 보면 몇 분 채 지나지 않아 아이들 목덜미엔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혀 또르르 흘러내린다. 집안에선 그렇게 옥신각신 다투던 녀석들이지만 밖에선 나오면 유일한 운동 파트너가 되어야 하기에 나름 쿵작이 잘 맞는 형제애를 발휘하며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난다. 시간 여유가 좀 더 있는 날엔 아파트 단지 너머 뒷산으로 향한다. 늘 가보던 길이 아니다 보니 길을 헤매기도 했지만 돌고 돌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누리는 성취감이 다르게 다가온다. 


깊어가는 가을 내음, 바람결에 살랑이는 바랑이 풀, 익어가는 단풍잎, 저마다 모양이 다른 조약돌, 이름 모를 고운 빛깔의 씨방까지...... 아이들 손에 스치는 모든 것들이 보물과도 같다. 자연 속에선 억지스러운 놀이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고, 가만히 있어도 심심하지 않다. 격렬히 몸을 움직인 끝에 찾아오는 나른하고 심심한 시간은 오히려 더 자유롭고 평온하다. 며칠 사이 자전거의 맛을 알아버린 두 녀석의 산책은 차원이 달라졌다. 마치 날개를 단 듯 공기를 가르며 쭉쭉 뻗어나가는 속도감을 온몸에 새겼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녀석들은 꿈속에서 자전거 탄 풍경 속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지 모르겠다. 그 꿈이 오래 이어지길, 이 좋은 가을날이 좀 더 오래 머물러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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