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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일 Aug 19. 2021

세상의 모든 은희들에게

영화 <벌새>를 보고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왔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엄마, 엄마, 하면서 꽤 오랜 시간 대문 앞에서 엄마를 소리쳐 불렀다. 소리는 몇분 사이에 울먹임으로 변해갔고, 나는 기어코 대문 앞에 주저 앉아 울어버렸다. 아주 어린 나이였고, 보통의 가정들처럼 싸움도 웃음도 있는 가족이었지만 나는 그때 직감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언제든, 예고없이 나를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사실 나는 엄마가 말없이 어디를 가면 열쇠를 대문 밖의 세번째 화분 받침대에 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은 내가 이미 늦어버렸고, 내가 열쇠를 찾아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엄마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 날 해가 질 때까지 대문앞에 주저 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그 날 대문 앞에 주저 앉아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며 엄마는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열쇠 여기 있다고 했잖아." 엄마는 그 날 내가 열쇠를 일부러 찾지 않았다는 것을 몰랐다. 아마 알았어도 궁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자랐다. 적당한 무관심과 간헐적인 사랑, 그리고 공기 같았던 불안과 가끔 숨통을 죄어오던 폭력 속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불안의 얼굴이었고, 그것은 엄마의 것이었다. 그 때 엄마는 가끔 아빠에게 맞았다. 그 폭력은 다시 나에게 돌아왔고, 다음날은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그런 날에는 식탁 맞은 편에 있던 책장의 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제의 일들이, 어제의 폭력을, 오늘의 평화를,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영화 <벌새>의 시작이다. 하교 후에 집을 제대로 찾지 못한 은희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엄마를 찾는다. 곧 자신의 집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걸음을 옮기는 은희의 얼굴에는 그 어떤 안도감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 후 집을 찾고, 자신을 맞아주는 엄마의 얼굴. 예의 무신경하고 반쯤 넋이 나가있는 듯한 얼굴. 그 얼굴에는 은희의 표정이 들어갈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은희는 집을 제대로 찾았지만, 결국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곳으로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긴다. 가끔 살아가다가 결코 내가 수용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이 찾아들 때, 늘 오버랩되는 엄마의 얼굴이 있었다. 시큰둥하고, 무기력하고, 지쳐 있는 그 얼굴. 나는 영원히 그 얼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란 것을,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직감했었다. 늘 가닿지 못하는, 은희가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그 소리처럼, 나는 엄마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듯, 결국 세상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임을.

그러나 오갈 데 없이 방황하는 은희에게도 버팀목이 되어주는 순간들이 있다.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친구, 짜릿한 일탈을 주는 애인, 나를 좋아한다는 후배의 고백. 그러나 어느 하나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없다. 유일하게 연민을 느꼈던 친구는 너무 쉽게 나를 배신하고, 애인은 자기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가장 먼저 나를 밀어낸다. 먼저 손을 내밀었던 후배마저 반짝이던 고백을 "이미 지나간 감정"이라 말한다. 그 사이 영원할 것 같았던 김일성이 죽었고, 갑자기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린다. 일상의 균열은 늘 예상치 못했던 생채기를 내고, 그것은 나에게도 예외없이 찾아온다.


"선생님도 제가 불쌍해서 잘해주시는 거예요?"
"바보 같은 질문에는 답 안해도 되지?"
그런 은희에게 영지가 있었다.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순간에 가차없이 그 감정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준 사람. 처음으로 은희의 표정을, 얼굴을 가만히 지켜본 사람.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고, 대답을 기다려준 사람. 나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순간에는 견디지 말고 맞서 싸워야한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 생각해보면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모든 질문은, 감정은, 의심은 모두 바보 같은 것들이었다. 이를 테면,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가"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인가" 같은 나 자신을 좀먹는 질문과 의심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의심이 잘못됐음을, 그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음을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우리 모두가 같은 질문으로 고통받고 있었음을 말이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고통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다. 고통이 있어야만 성장이 있다고 믿었으므로. 그러나 이제 되묻고 싶다. 모든 고통이 성장을 담보하는가? 대부분의 고통은 통과하는 순간 나를 이전과 다른 형태로 변형시켜 놓았다. 고통이 지나간 후의 일상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이 성장이라 믿었다. 그러나 뒤틀린 일상은 때로 내게 더 큰 상처를 주었고, 한동안 그 상처에 붙들린 채로 얼마간 절망하기도 했다. <벌새>의 은희를 보며 나에게 되물었다. 나는 내가 받아야 할 상처만을 받았는가? 아빠와 엄마의 싸움을 목격한 후 다음날 아침 부서진 스탠드를 바라보는 은희의 표정에서 어떤 성장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오빠의 폭력에 소리를 치는 은희가 폭력을 이겨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떤 고통은 끊임없이 인간을 마모시킬 뿐이다.


영화의 시작 은희가 엄마를 찾기 시작할 때부터 거의 모든 장면을 울면서 봤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원형질의 감각은 쉽게 상쇄되지가 않았고, 그 감정과 연결되어 있는 정서들은 인생의 어떤 관문에 부딪힐 때마다 나의 발목을 걸고 넘어졌다. 영화 <벌새>에는 끊임없이 걸고 넘어지는 문턱 앞에서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는 그 모든 나의 순간들이 인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아직 세상에 고통받는 여성들이 많지만 함부로 동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알 수 없으니까.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피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 끊임없이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도 성장하는 개인이 있다는 희망.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왔고, 끝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견뎌내고, 또 맞서 싸우며 인생의 어느 한 챕터를 지나온다는 것.

너무 많은 여성들이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든 엄마가, 그래서 그걸 지켜보는 딸이 불안에 떨며 그 얼굴을 닮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바보 같은 질문은 멈추기를. 받지 않아도 될 상처는 받지 않기를. 세상의 모든 은희들에게 작은 위로를 보내고 싶다. 이 영화가 그런 것처럼.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학원은 그만둬서 미안해
방학 끝나면 연락할게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이야기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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