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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일 Oct 24. 2021

탈코일기


나 숏컷할래. 거의 충동적으로 한 말이었다. 아니, 사실은 충동적이지 않다. 탈코르셋은 지난 몇년간 나를 괴롭히고 있었으니까. 고로 투블럭과 노메이크업을 고민한게 자그마치 1년은 된 것이다. 탈코르셋을 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야 사람으로 보일 수 있었으니까. 그러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여성으로 성애 대상이 되는 것을 자처했다. 꾸밈이 주는 만족은 달콤했다. 어디서나 나를 주목받게 만들었고, 공적인 스피커가 되어 자신감을 갖게 만들었고, 남자들의 끊임없는 대시를 받게 만들었고, 거기에 따라오는 호의와 편익은 내가 코르셋을 벗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족쇄였다. 나는 위안했다. 나는 꾸미는 걸 좋아하니까. 꾸민 내가 마음에 드니까. 예쁜 나를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예쁘게 차려입고, 인생 사진을 찍고, 예쁘게 나온 사진을 프로필로 바꾸는 것은 지난 몇년간 내가 가장 몰두했던 일이었다. 예쁜 나를 만들기, 그런 나를 전시하기, 그래서 관심받기.


슬슬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렇게 까지 "예쁜 외모"에 집착하는 것일까. 오랜 시간 회피였지만 결국 답은 하나였다. 남자에게 지속적으로 욕망 당하기. 내가 외모에 가장 신경을 쓴 날은, 모르는 이성을 처음 만나러 가야하는 자리였다. 그게 소개팅이든, 일이든, 사적 모임이든 모두 같았다. 거기에 이성이 존재한다면 나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로맨스"를 위해 기꺼이 시간과 에너지, 비용을 투자했다. 더이상 회피가 어려워진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야 나는 인정했다. 결국 남자였구나. 허탈했다. 끊임없는 자기혐오를 느꼈다. 내 자존감이란 결국 남자에게서 비롯되는 것이었구나. 물론 깨달은 뒤에도 꾸밈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잘 꾸며진 내 모습이 어딘가 싫어졌고, 하찮아 보였고, 짜증이 났다. 하루에도 수없이 스스로를 혐오하고 미워하고 실망하고.. 이 고리를 끊는 일은 하나였다. 꾸밈을 포기하기. 못생겨지기. 그런 스스로를 직면하기. 극약처방 같은 것이었지만,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탈코르셋을 결심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탈코르셋의 범위를 정하는 일이었다. 머리는 잘라야 했지만, 투블럭을 칠 자신은 도저히 나지가 않아 숏컷으로 타협했다. 가장 먼저 해야하는 일은 머리를 자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민낯으로 나가려고 애를 써도, 옷을 기본 차림으로 하려고 애를 써도 결국 웨이브가 있는 긴 머리 때문에 그 머리에 맞는 스타일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머리였다. 머리를 잘라야했다. 그 와중에도 "예뻐보이는" 숏컷 스타일을 찾아 헤매는 내 자신에게서 끊임 없는 혐오를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는 봐주자. 노력이 가상하잖아.


그리고 주변에 떠벌렸다. 머리를 자를 거라고. 생각이 행동으로 가려면 그 중간에 "말하기"라는 단계가 있어야 한다. 나는 그동안 이걸 못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한 것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나 머리 자를거야. 이야기를 꺼내면서 결심은 더 굳어졌다. 이제 빼박이야. 나는 가야한다. 그게 어디든. 사뭇 비장했다. 그러고서는 집에 돌아와 거울로 이리저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한숨이 나오기 시작했다. 숏컷은 얼굴과의 정면승부라더니 진짜 그게 맞는가보다. 나름 예쁘장하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왜이렇게 못나 보이는지. 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시작되었다. 며칠간 이 온탕냉탕을 끊임없이 왔다 갔다 했다. 해야돼, 아니 안될 거 같은데, 그래도 하자, 정 아니면 다시 기르면 되잖아, 아휴 무슨 그 머리카락 하나 가지고 이렇게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해? 그러다가 깨달았다. 긴머리는 내 생존이었구나. 결국 꾸밈은 여성에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와 같은 값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깨달으니 새삼스러웠다. 빌어먹을 놈의 외모 강박. 벗어나자. 나는 벗어날꺼야. 거울을 치워버렸다. 나는 갈꺼야. 흩어진 자존감을 어떻게든 주워 담으며 다시 결심을 다졌다. 무조건 한다. 되든 안되든. 내일의 나는 어제와는 다른 나이겠지. 어떻게든 조금 더 나은.


미용실을 예약했다. 드디어 당일. 중학생 이후 한번도 잃어본 적 없는 긴머리였는데. 미용실에 가는 순간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의자에 앉고 미용사가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물론 왜 머리를 자르냐, 무슨 일이 있었냐 같은 질문이 따라 붙는 건 통과의례였다. "귀찮아서요"로 답을 일축하고 거울을 보았다. 와, 긴머리를 숏컷으로 자르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 지 몰랐다. 1시간 넘게 커트를 한 것 같다. 점점 짧아지는 머리, 헬멧을 쓴 것 같아 보이는 두상을 보고 있자니 약간 현타가 왔다. 뭐지, 이거 제대로 되는 거 맞나? 불안하기도 했다. 이윽고 커트가 끝나고 스타일링이 시작되었다. 드라이까지 마치고 원장님이 뒷머리 보라고 거울을 주셨는데 보자마자 웃음이 실실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목 뒤에 닿는 게 없어서 어색했다. 허전한 뒷목을 계속 손으로 만졌다. 어색해하는 나를 보고 원장님은 흐뭇하게 웃으셨다. 아마 본인 커트가 맘에 든 눈치였다. 나도 웃어줘야 할 것 같아 그렇게 했다. 그리고 미용실을 딱 나오는데, 바람이 휙 불면서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촉이었다. 바람이 뒷목을 쓸고 지나갈 때,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를 샥샥 고개를 흔들어서 정리할 때, 뒤통수의 짧은 머리를 만질 때의 느낌. 새로웠다.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어울리고 안어울리고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해방감이랄까. 밀린 숙제를 한꺼번에 해버린 느낌이랄까. 낯선 자유였다.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보고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넘겨보았다. 문득 내가 너무 대견해졌다. 결국 나와의 싸움에서 이긴 나, 행동하기로 결심한 나, 그 결심을 실천한 나. 기특해서 엉덩이를 몇 번 툭툭 쳐줬다. 나에게 영향을 준 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결국 이 것을 하기로, 이 길을 가기로, 이 행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행동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나도 내 자신을 더 멋있는 사람으로 키워 볼 생각이다. 잘했으니 상을 줘야지. 사실 원래 혼자 밥먹는 걸 좋아해서 어디든 잘 가서 잘 먹는 편인데,  식당에 갔는데 뭔가 생소한 느낌이었다. 전에는 혼자 밥을 먹게되면 내 테이블에 꽂히는 시선들이 있어서 항상 신경을 쓰면서 밥을 먹었다. 이전까지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머리 하나 잘랐는데 그 시선이 없어지다니. 어쩌면 그 시선은 상상 속의 내가 나를 검열하던 시선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밖에 나서면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내 몸을, 내 모습을 대상화시켰던 것이었다. 남에게 보이는 나를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투영시켰다. 행동이 자유로울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처음이었다. 혼자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서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편안하게 주저앉아 밥을 먹은 것. 이렇게 무언갈 온전히 맛을 느끼면서 먹어본 적이 언제였더라.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와서 잠깐 눈을 붙였다. 이따 7시 반에는 글쓰기 워크숍을 나가야 한다. 오늘이 첫날이었다. 근데 이게 웬걸 눈을 뜨니 벌써 7시였다. 약속 장소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 20분. 머리를 쓱쓱 만지고 거울을 보니 자기 전에 화장을 지웠다는 걸 깨달았다. 고로 지금은 맨얼굴. 하 미치겠네. 처음 보는 사람들 만나는 자리에 민낯으로 나간다고?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어찌됐든 마스크가 있었으니 벗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급하게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자리에 나갔다. 자기 소개를 하고 자연스럽게 마스크를 벗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서 소름이 끼쳤다. 민낯으로 공적인 자리에 나간 건..아마 십년전? 생각도 안난다. 잠깐 편의점이나 친한 친구를 만나러 나간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 그것도 처음 만나는 사람을 앞에서, 아무 꾸밈없이 나간다는 것은 처음이었다. 근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말을 하다가 가끔 눈을 비볐다. 화장을 하고 나가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화장이 번지기 때문에. 그리고 그동안 끊임없이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 화장이 번지지 않았을지, 립스틱이 지워지지 않았을지, 마스카라는 제대로 붙어있는건지 등등을 끊임없이 검열했다는 걸 알았다. 맨얼굴로 나가서 상대방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눠보니 알게 된 것이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얼굴에 신경쓰고 있었는가를. 모임이 끝나고 돌아와 차에서 얼굴을 확인했는데, 진짜 얼굴이 빛나고 있었다. 활짝 웃어보았다. 맨얼굴이 마음에 든 게 언제적이더라.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늦은 일기를 쓴다. 오늘은 꼭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어제보다 나아진 나를,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는 나를 남겨놓고 싶었다. 먼저 행동해준 많은 여성들의 결단이 있었기에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쓴다. 내가 그러하듯 나도 누군가의 용기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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