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하는데 배가 고팠다. 이상했다. 나는 원래 배고픔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무언가를 먹을 때는 먹고 싶거나, 먹을 때가 되거나, 누군가 먹을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서 무언가를 허겁지겁 먹은 적이 언제였더라. 1년 전 초절식 수준의 다이어트를 했을 때가 기억 난다. 아, 그때는 진짜 배가 고팠지. 저녁도 안먹고 운동을 가서 힘이 없는데도 쥐어 짜내서 운동을 하고 거의 녹초로 집에 돌아와서는 배고픔을 잊기 위해 씻고 빨리 자는 것만이 최선이던 그 때. 이내 고개를 흔들어 떠오르는 감정과 기억, 생각들을 조각내버렸다. 다시는 그런 미친 짓은 하지 않을거야.
생각해보면 내 과거는 딱 두가지로 구분되었다. 다이어트를 할 때, 다이어트를 하지 않을 때. 그러나 다이어트를 하지 않을 때조차 늘 '다이어트를 해야하는데'라는 강박에 시달렸다. 물론 지금도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무언가 먹을 것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가장 처음으로 작동되는 알고리즘은 애석하게도, "이 음식은 살이 찌는 음식인가, 아닌가"이다. 나는 이 기초 세팅값을 다이어트에서 건강으로, 그러니까 "이 음식은 건강에 좋은가, 나쁜가"로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물론 그 노력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삼십몇년을 지나 고착화된 프로그램이 고작 몇개월 포맷한다고 삭제될리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도 이렇게 애를 쓴다. 다이어트를 하려고 애를 쓰고, 하지 않으려고 해도 애를 써야하고. 어이가 없지만 어떡하겠나. 이게 현실인 것을.
8년간 몸 담았던 회사를 나오면서 기존 컴퓨터에 저장된 개인 파일을 어찌할까하다가 아예 하드를 교체해버렸다. 아저씨는 요즘 데이터 복구 시스템이 너무 잘 되어있어서 데이터를 완전히 삭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했다. 저장된 데이터를 완전히 삭제하기 위해서는 포맷도 3-4번을 해야하고, 거기에 다른 데이터를 덧씌우는 작업을 여러번 거쳐야만 가능하다고 했다. 한번 입력된 데이터는 웬만해서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나는 '다이어트'를 떠올릴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한다. 내 의식에, 내 몸에, 내 행동에 인장처럼 새겨져 있는 '다이어트'라는 입력값을 지우기 위해 나는 얼마나 스스로를 포맷시켜야 할까? 아니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왜 먹는 것을 마주했을 때, 충분히 배부를 때까지 식사를 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종일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도대체 그것은 무엇에 대한 죄책감이지? 참아야 하는데 또 먹어버렸어. 어쩌지?, 또 살찌는 걸 먹었구나. 내일은 꼭 운동해야 겠다. 정해진 식사 시간이 아닌데 또 먹어버렸어. 미쳤네. 거울 좀 봐라. 배가 나온 것 같아. 허벅지가 너무 굵잖아. 팔뚝에 붙어있는 이 혐오스런 살들은 다 뭐지? 아 보기 싫어, 돼지 같아.
퇴근을 하며 오늘 야근을 한다는 옆자리 동료에게 물었다. "저녁도 안먹고 해요?" "네.. 근데 저 원래 저녁을 잘 안먹어요." 순간 내가 그 동료의 몸을 스캔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다이어트 알고리즘만큼 견고한 몸매 평가 알고리즘이 작동된 것이었다. 미쳤네. 정신 못차려? 하지만 나는 안다. 결국 타인의 몸을 평가하는 잣대가 그대로 나에게 옮겨온다는 것을. 내가 타인을 보는 시선은, 곧 내가 나를 보는 기준이기도 한 것이다. '저녁을 안먹는데 몸이 왜 저럴까'하는 생각은 내가 누군가에게 저녁을 먹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그런것처럼 타인들도 같은 생각을 할 테니까.
다른 여성들의 몸이 창 밖의 풍경처럼 흘러갔으면 좋겠다.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내게 그 어떤 생각이나 감정, 평가들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인식되는 순간에 그냥 휘발되어 버렸으면. 그러면 나도 더이상 거울 앞에서 서성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 몸에게, 나에게, 내 얼굴에 더이상 화를 내지 않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