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가량 지속했던 심리상담이 얼마 전에 끝났다. 길지 않은 회기였지만 소정의 결과물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나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고 상담 선생님께 고백했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정의 내리지 못했다. 나를 어떤 형용사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 늘 고민스러웠다. 상반된 모습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나를 볼 때마다 사춘기 아이처럼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물음이 계속 이어졌다.
겁쟁이 같은 모습을 할 때도 있지만, 큰 일에는 담대하게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아주 현실적인 고민을 하면서도 공상에 빠질 때가 있다. 또,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다가도 문득 외로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약속을 정하고 나면 그게 또 금세 귀찮아지곤 한다. 그랬다가도 약속 날 준비는 누구보다 빠르게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그 시간에 몰입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또 잠깐 공허해질 때도 있다. 사람을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떤 날은 잘 모르는 사람과 말을 섞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편한데, 또 어떤 날은 잘 모르는 사람과 한 자리에 있는 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누구나 한 가지의 모습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데, 나는 나를 어떤 틀에 넣어 정의하고 싶어 했다. 게다가 꼭 어떤 인간으로 정의되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러고 싶어 했다. 아마 나의 태생적 불안이 한 일일 것이다. 불안은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 통제하고 싶어 하니까 말이다. 나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때에도 어떤 틀 안에 집어넣고, 하나의 형용사로 정의된 인간으로 이해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어떤 캐릭터를 가지고 있듯이 나도 특정한 하나의 성격을 가진 캐릭터로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야 '내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혼란스러운 마음이 정리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극과 연출에 따른 단편적인 모습이 아닌가.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나는 어떤 캐릭터일까?'를 생각했다. 다양한 모습의 내가 있음을 인정하기보다는 그 다양한 모습 중에 하나만을 골라 '나'로 정의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3개월 간 심리상담을 받고, 스스로 마음 정리를 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에 대해 새롭게 하게 된 생각은 나는 '다채로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제 그렇게 나를 이해하려고 한다.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것에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나는 다채롭게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이해하려고 한다.
때로는 겁쟁이가 되고, 때로는 용감한 사람이 되는 나.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고, 어려워하기도 하는 나. 만남의 약속을 귀찮아하다가도 약속 장소에 제일 먼저 도착해 있는 나.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즐기기도 하는 나. 양면적인 모습을 다 가지고 있어서 하나의 단어로만 표현하기는 어려운, '다채로운 나'의 모습을 인정해보려고 한다.
오늘의 다짐, 생각과는 다르게 또다시 '나는 대체 뭔가'라는 생각에 빠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때 다시 이 글을 꺼내보면서 '아, 난 이런 사람이었지.'하고 안심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는다. 3개월여간 좋은 파트너가 되어주신 상담선생님께도, 성실하게 상담의 여정을 지나온 나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