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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nJ Mar 02. 2024

나다 할머니-02

이탈리아에서의 기억.

그분이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안 것은 5년 전 이탈리아 여행에서였다.

2006년도 9월부터 2008년 4월까지 살았던 이탈리아를 뒤로 하고, 새로운 일자리가 있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나라로  터를 옮겨온 후 거의 7-8년 만의 방문이었다. 남편이 참가하는 학회가 우리가 살았던 그곳-폰테데라에서 열리는 관계로 모처럼 다 같이 가족여행을 가보자고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었다.

그때와 달리 아이는 둘이 늘어 셋이 되었고, 나이는 사십 대에 들어선 나는 나다 할머니의 소식이 궁금했다. 스페인에 와서 둘째를 낳고서 안부 편지 왕래를 한 번만 하고 말았으니까.

피사에 있는 에어 비앤비에 여장을 풀고, 친하게 지냈던 옛 이탈리아 동료의 집을 방문하고, 관광객 기분을 내며 아이들을 몰고 유명한 스폿을 답사하고 난 후 학회 마지막날인가에 폰테데라에 갔다. 피사에서 기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조그만 도시 폰테데라는 우리가 떠났을 때와 거의 변화가 없는 모습이었다.


두 아들들을 앞세우고 아직 아기인 막내는 유모차에 태우고 시내를 걷는 중에 슬쩍 돌아본 빵집 안에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설마설마하면서 가까이 갔는데, 맞았다. 우리 옆윗집에 살던(정확히는 나다 할머니 옆집) 마리아 할머니였다. 전직 미용사로 은퇴한 분인데, 놀면 뭐 해 하면서 본인의 가라지에 작은 미용실을 꾸며서 가족 친지 친구들의 머리를 다듬어주면서 소일하던 분이었다. 그분이 우리 큰아들 머리도 손질해 주시면 나는 부지런히 한국요리를 해다가 대접하곤 했던 바로 그분. 

세상에나, 마리아 할머니도 날 알아봤다. 너무나 뜻밖이지만 반가운 마음에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애들이 옆에 올망졸망 있는데, 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한참을 울었다가 웃었다가 했다. 마리아 할머니는 나를 다독이고서 우리 애들에게 초콜릿 과자를 하나씩 사주었다. 

그리고서 우리 살던 그 옛집 앞에 가서 마리아 할머니와 할머니 남편 지오바니와 함께 한참을 이야기하던 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나다 할머니는 우리가 다시 오기 1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집 앞 길목에 서서 이야기를 하는데, 마침 나다 할머니의 남편 디노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마리아 할머니가 나를 가리켜 레오엄마라고, 기억하시죠? 말을 건네니  디노 할아버지는 "누구? 난 모르겠는데..." 하면서 지나갔다. 마리아 할머니는 저 양반 부인 돌아가고 나서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다고 설명했다. 디노 할아버지는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각별했던 나다 할머니는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았던 그날밤의 공기가 서늘했던가...? 그 후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는 것만은 기억이 나고, 어떻게 숙소로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 것은, 마리아 할머니를 만나서 어린애처럼 울었던 것. 그때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조그만 아기 하나를 데리고 어쩔 줄 몰라하던 시절의 나를 떠올렸던 것일까.  더 이상 그때의 그런 나는 존재하지 않지만, 다시 폰테데라에 간다면 그 감정이 오롯이 되살아날 것이다. 지나고 나니 그 기억도 추억이 되었다만.

이탈리아는 늘 가고 싶은 곳이지만 폰테데라에 가지는 않을 것 같다.  또 다른 부고를 감당하려면 마음이 좀 더 딱딱해져야 할 텐데, 내 깜냥이, 그게 언제 될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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